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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15살에 끌려간 미등록 위안부 할머니 숨진지 16년만에 피해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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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하복향 할머니, '집 한 채 산다' 말에 속아 3년간 필리핀서 고초

정부 등록 전 세상 떠나…사상 처음으로 증언 아닌 사료로 피해 입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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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하복향 할머니 포로 심문카드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경북 경산에서 자란 한 소녀는 "공장에 일하러 가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다"는 말에 속아 1941년 만 15세의 나이에 타이완행 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그가 도착한 곳은 공장이 아니라 여성을 성적 도구로 팔아넘기는 곳이었다. 할머니는 업주 손에 이끌려 다른 여성 40여 명과 함께 머나먼 필리핀 마닐라까지 끌려갔다. 그리고 이후 3년간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다.

생전에 위안부 피해 사실을 털어놨지만, 정부에 정식 등록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고(故) 하복향 할머니의 사연은 서울시와 서울대 연구팀의 연구로 세상에 드러났다. 피해자의 증언이 아닌 사료를 통해 위안부 피해 사실이 증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시는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교수 연구팀과 함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자료를 발굴해 조사·분석한 결과 이 같은 성과를 거뒀다고 11일 밝혔다.

하복향 할머니는 광복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피해 신고를 하지 않고 지냈다. 그러다가 2001년 2월 고혜정 한국정신대연구소 소장을 만나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들려줬다.

[서울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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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촬영한 생전의 하복향 할머니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하 할머니와 고 소장은 두 번째 만남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할머니가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그의 이야기는 피해자 등록도 안된 상태에서 16년간 묻히고 말았다.

시는 "정부에 공식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는 239명이지만, 하 할머니처럼 피해 사실을 밝히지 않아 공식적으로 파악되지 않은 피해자가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번에 발굴된 자료를 정리·분석해 체계적인 실태 파악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구팀은 필리핀으로 끌려간 위안부 피해자의 포로 심문카드 33개를 확보, 사진·생일·주소지·손가락 지문 등을 토대로 할머니의 피해 사실을 밝혀냈다.

심문카드에 따르면 포로번호 '51J-20946-C1'인 '가푸코', 즉 하복향 할머니는 1945년 9월 14일 필리핀 루손 섬에서 미군에 의해 발견돼 루손 제1수용소에 갇혔다. 하 할머니는 이후 1945년 10월 12일 다른 민간인 억류자 150여 명과 함께 귀환선 'J.N.E 60호'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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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하복향 할머니 지문 조회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특히 심문카드에 있던 열 손가락 지문은 할머니의 신원을 확인해 그의 이야기가 세상에 드러나는 데 결정적인 실마리가 됐다.

연구팀은 서울시를 통해 경찰청에 심문카드의 지문이 하 할머니의 것이 맞는지 확인을 의뢰했고, 그 결과 일치한다는 답변을 얻었다.

엄규숙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장은 "영화 '아이캔스피크'처럼 우리 주변엔 공식적으로 파악되지 않은 위안부 피해자가 많을 것"이라며 "서울시는 지속해서 꾸준한 자료 조사, 발굴, 분석을 통해 역사를 증명할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축적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ts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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