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 근육량, 호르몬 등 달라…
性別이 의료 전반 영향 미쳐도 '170㎝·65㎏ 남자' 기준 여전
여자는 약물 부작용 겪기 십상
남녀 맞춤형으로 처방하고 암 검진 권장 나이도 달리해야
김철중 의학전문기자·전문의 |
몇 해 전 미국서 벌어진 일이다. 중년 여성이 아침에 차를 몰고 출근하다가 고속도로에서 트럭을 들이받았다. 차량은 멈추지 않고 휘청대더니 연쇄 추돌 사고까지 일으켰다. 멀쩡한 사람이 운전했을 것이라고 믿기지 않는 상식 밖 사고였다. 순간적으로 발작이 일어났거나 마약 복용자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나중에 그녀의 혈액에서 수면제 '졸피뎀'이 상당한 농도로 검출됐다. 졸피뎀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가수면 상태에서 운전한 것이다.
그전부터 이곳저곳에서 '졸피뎀 사고'가 일어났다. 졸다가 접촉 사고를 냈다느니,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 중요한 면접시험에 가지 못했다느니 하는 말들이 돌았다. 거의 모두 여자였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알아보니, 졸피뎀 약물 대사가 여성에게서 천천히 일어난다는 점이 파악됐다. 남녀 차이 없이 같은 용량으로 여성에게 졸피뎀이 처방되다 보니 약에 취한 상황에서 사달이 난 것이다. 이에 2013년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FDA)은 여성에게 졸피뎀 처방 용량을 절반으로 줄이라는 권장안을 발표했다.
졸피뎀을 계기로 남성과 여성의 의학적 차이가 뚜렷하니 달리 접근해야 한다는 성별 의학(sex & gender medicine)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 여성과 남성은 혈액과 근육량이 다르다. 지방도 남자는 몸속에 많고, 여자는 피하(皮下)에 많다. 여성은 특히나 다양한 호르몬에 영향을 받는다. 제약회사들은 신약 개발 과정에서 호르몬에 약효가 영향을 받을까 봐 임상시험에 여성을 가능한 한 배제하는 경향이 있었다. 1990년대 후반 부작용으로 퇴출당한 약물 10개 중 8개가 여성에서 탈을 일으킨 사례였다. 임상시험에 참여한 여성이 적었기에 부작용이 뒤늦게 발견된 탓이다. 1960년대 임산부가 복용해 기형아를 양산한 수면제 탈리도마이드 약화(藥禍) 사건도 약물 개발 과정에서 가임기 여성이 빠져 일어난 비극이다. 여전히 170㎝, 65㎏ 남자 몸이 의학의 기준이다.
/조선일보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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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차이는 의료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대장암의 경우, 여성은 남성보다 오른쪽에 암이 잘 생긴다. 내시경으로 접근하기 상대적으로 어려운 데다, 납작한 암이 많아 늦게 발견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그 부위는 장내 잔존물이 지저분하게 남아 있기 쉽다. 여성은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을 때 장 세정제 복용과 관찰을 더 철저히 해야 한다. 생사가 달린 문제임에도 그런 남녀 차이는 고려되지 않는다. 여자는 대장암 빈발 나이가 남자보다 5년 정도 늦고, 그만큼 늦게까지 생긴다. 그렇다면 암 검진 권장 나이도 남녀를 달리해야 한다.
대개 남성 중심 임상 연구가 이뤄졌기에 남자가 유리할 것 같지만, 반대 사례도 꽤 있다. 골다공증은 여성을 기준으로 골절 위험도나 후유증을 평가한다. 남자도 고령사회를 맞아 골다공증이 많은데, 여성의 질병이라는 인식 때문에 방치되다가 골절이 의외로 많고 진단도 늦다. 우울증도 남자에서 경각심이 낮아 병을 키운다. 심장병은 남성 병이라는 인식하에 여성이 심장병으로 더 많이 사망하는데도 소극적으로 진단하고 치료한다.
남녀 차이는 보건·의료 정책 우선순위와도 관련 있다. 예를 들어 자궁경부암 예방 백신 접종 사업과 남성 환자가 많은 척추질환 지원책이 양립할 때, 결정권자가 남자 우위라면 여자 정책이 뒤로 밀리기 십상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는 문화에 따라 남자는 온종일 근육 운동만 하다 다치고, 여자는 날씬해야 한다는 분위기에 따라 극도의 다이어트에 빠져 건강을 해친다. 남녀 공히 공유해야 할 건강상의 포인트가 많음에도 한쪽에 치우친다.
남녀 간 차이를 받아들이고 성별 맞춤형 처방과 보건의료 제도를 만들면 둘 다 더 행복해진다. 오류와 실수도 줄어든다. 학교에서 남녀 차이를 가르쳐야 성별 갈등이 준다. 양성 평등과 행복은 남녀 차이를 알고 배우고 연구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김철중 의학전문기자·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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