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곳곳 군사 정변 있었지만 혁명으로 승화된 건 '5·16'뿐
한국 발전 사례 세계가 공부했고 韓·日 관계 정상화는 대담한 결정
박정희, 14일로 탄생 100주년… 그의 업적과 허물 함께 성찰해야
복거일 소설가 |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제국주의 열강이 쇠퇴하자 많은 식민지가 독립했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지향했지만, 곧 군부 정변(政變)으로 압제적 사회가 되었다. 식민지 풍토에서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가 바로 나올 수는 없었다. 가난과 혼란이 사회 존속을 위협하게 되면 실질적 대안은 군부가 권력을 잡고 무력으로 질서를 강요하는 길뿐이었다. 그러나 군부의 통치는 자유로운 사회로 발전하는 길을 가로막았고, 흔히 부패했다.
1961년 한국에서 일어난 군부 정변은 그래서 세계의 기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정변을 이끈 박정희는 뛰어난 지도력으로 한국 사회를 혁명적으로 발전시켰다. 덕분에 '5·16'은 군부 정변에서 진정한 혁명으로 승화되었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40곳 가까운 신생국에서 일어난 군부 정변 가운데 이처럼 혁명으로 승화한 경우는 '5·16'뿐이다.
당시 한국군은 치열한 6·25전쟁에서 단련된 군대였다. 전쟁에선 비합리적인 것들이 빠르게 도태되므로 국군은 급속히 합리적 집단으로 진화했다. 아울러 미군의 합리적 관행을 받아들임으로써 아직 중세적 면모가 남아 있던 한국 사회에서 군대는 가장 현대적이고 합리적인 집단으로 자라났다. 신생국 군대 가운데 전쟁을 통해 단련되고 현대화한 군은 한국군뿐이었다. 이런 인적 자원을 활용해서 박정희는 사회를 효과적으로 개혁하고 발전시켰다.
1965년 12월 17일 한일회담 비준서에 서명하는 박정희 대통령. /조선일보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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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한국은 인류 역사에서 당시까지는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그 성취 비결은 정통 경제학 이론을 따른 대외 지향적 경제정책이었다. 이것은 보기보다는 대담한 결정이었다. 당시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지닌 경제 발전 전략은 아르헨티나 경제학자 라울 프레비시의 '종속 이론'이었다. 선진국과 후진국 간 교역은 후진국에 불리하니 후진국은 수입 대체를 지향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프레비시의 처방은 그럴듯했으므로 거의 모든 후진국이 그 이론을 따랐다. 오로지 박정희만이 수출을 통한 경제 발전 전략을 골랐다.
종속 이론을 따른 나라가 모두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통 경제학 이론을 따른 한국이 경이적 경제 발전을 이루자 다른 나라들이 한국의 정책을 따르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것이 경제성장의 표준 처방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를 이롭게 한 일로서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하다.
한국이 그렇게 해외로 뻗어나가는 길목에 일본이 있었다.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한국은 일본을 거쳐야 해외로 나갈 수 있었다. 아울러 박정희는 고위 장교로 6·25전쟁을 치른 터라 일본이 한국 안보에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았다. 한반도에서 싸운 미군은 육군까지도 일본의 기지에서 발진했다. '6·25전쟁 때 일본이 이익을 크게 보았다'는 주장이 가리키듯 아군의 탄약과 보급품은 대부분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박정희는 그런 현실을 깊이 인식하고 일본과 관계를 정상화했다. 두 나라 사이의 불행한 역사 때문에 국가 지도자 모두가 그 일을 꺼렸고 국민의 지지도 받지 못했지만 그는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결정이었고 얼마나 중요한 성취였는지는 요즘 주한 일본 공관들 앞에 세운 '소녀상'을 정부가 치우지 못하는 현실이 말해준다. 그래서 그의 여러 업적 가운데 으뜸은 일본과 관계를 정상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박정희가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바탕은 그가 누린 권력이다. 군부에 대한 영향력과 사회 발전을 이룬 지도자의 권위가 합쳐진 그의 권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렇게 큰 권력은 놓기가 쉽지 않다. 큰 권력을 쥔 지도자가 헌법 규정에 따라 물러나는 것은 민주주의 전통을 크게 강화하는 일이어서 그가 할 수 있는 어떤 일보다 애국적이었다.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었지만 그는 그 길을 고르지 못했다. 그 후로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세'여서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기가 점점 어려워졌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충실한 혁명 동지들을 억압했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민주공화당을 약화시켰다. 그 뒤의 역사는 그의 선택이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우리 사회를 아주 허약하게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폴란드 역사학자 레셰크 콜라코프스키는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역사를 배운다"고 했다. 자신의 정체를 아는 것은 자신이 나아갈 길을 찾는 첫걸음이다. 박정희는 한국 사회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고, 우리는 모두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아직도 깊이 스며 있는 그의 영향을 제대로 아는 것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게 되는 과정이다. 내일(14일)은 그의 탄생 100주년 되는 날이다. 이를 계기로 그의 업적과 허물을 성찰하는 자리가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복거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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