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시장 주 구매층 2030세대, '정색하는' 제목 불편해해
긴 글보다 짤막한 한 구절 인기
'아무튼' '그래도' '어쩌다' 같은 부사로 시작한다. 혹은 '어이없게도' '닥치고'처럼 형용사·동사를 부사형으로 활용해 시작한다. 그러면서 완결된 문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운을 남긴다. 여운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부사 뒤에 쉼표를 찍기도 한다. 요즘 국내 출판계에서 두드러지는 책 제목 트렌드다. 만화가 박광수 에세이집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2014)처럼 부사만 세 번 되풀이되는 제목의 책도 있다. 지난달 출간된 과학책 '세상 뭐든, 물리'는 제목 원안이 '세상 모든 물리'였지만 요즘 유행하는 제목 경향에 맞추기 위해 '모든'을 '뭐든'으로 바꾸고 쉼표를 넣었다. 그렇지만 '세상 뭐든'은 부사형은 아니다.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문맥상 이 제목에서 '세상 뭐든'은 주어로 쓰였다"고 했다.
‘어쩌다’, ‘아무튼’ 등 부사로 시작하는 책 제목이 유행이다. 사진은 만화가 박광수 에세이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의 일러스트. /청림출판 |
최근의 유행이 시작되기 전까지 출판 편집자들은 책 제목을 부사로 시작하는 걸 꺼려 왔다. 한 출판인은 "책 제목은 카테고리와 소재를 정확히 보여주는 인덱스적 기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목에 부사를 잘 쓰지 않았다"면서 "그래서 1999년 전여옥 에세이 '간절히@두려움 없이'가 나왔을 때 굉장히 신선했다"고 말했다. 약 10년 전만 해도 론다 번의 '시크릿'(2007)처럼 한 단어 제목이나 김혜남의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2008)처럼 완결된 문장으로 된 제목이 유행했다.
왜 지금 부사인가. 출판시장의 주 구매층인 20~30대가 소위 '정색하는' 제목에 호감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어쩌다 어른'은 마음은 여전히 소녀이지만 몸은 중년이 되어가는 독신 여성의 내면을 담은 에세이. 이 책을 낸 스윙밴드 출판사 이수은 대표는 "인생 목표가 '퇴사'라고 말하는 요즘 청춘들은 확신이나 주장이 담긴 제목에 반응하지 않는다. 일종의 루저(loser) 정서를 담고 있어서 자신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제목을 원하는데 이들이 '어쩌다' 같은 맥 없는 부사로 시작하는 제목을 좋아한다"고 했다.
'어쩌다'가 '원하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라는 수동(受動)의 부사라면 '아무튼'은 그나마 '누가 뭐래도 나는'이라는 의지가 녹아 있는 부사다. '아무튼, 피트니스' '아무튼, 쇼핑' 등 평범한 사람들의 사소한 취미를 담은 '아무튼 시리즈' 기획에 참여한 코난북스 이정규 대표는 "주변 상황에 개의치 않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걸 하고 보겠다는 젊은 세대의 특성을 반영한 제목"이라고 했다. 긴 글보다 짤막한 한 구절이 유행하는 소셜미디어 시대의 영향이라는 분석도 있다.
출판 평론가 한미화씨는 "옛날 같으면 '어쩌다 어른'이라고 하기보다는 '성인이 된다는 것의 이론과 실제' 류의 제목이 채택되지 않았겠느냐"면서 "인스타그램의 해시태그(#)처럼 완결된 문장이 아닌 책 제목이 당분간 유행할 것"이라고 했다.
[곽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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