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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노트북을 열며] 적폐청산이 닮아서는 안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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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김승현 사회2부 부데스크


그가 그렇게 화를 낼 줄 몰랐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격앙됐다. “유도 신문 아닙니까. 도대체 누구한테 그런 말을 들었습니까. 그게 사실이라는 근거를 대고 물으셔야죠.” 점잖기로 소문난 변호사의 당혹스러운 반응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반론할 시간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8년 전의 질문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사건에 등장했던 명품 시계에 관한 것이었다. 전화를 받은 이는 당시 노 전 대통령의 변호인,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이다. 시계를 둘러싼 신빙성 있는 정보가 쌓이자 우리 취재팀은 재확인과 반론이 필요했다. 문 변호사의 주장이 타당했지만, 취재 내용을 최종적으로 확인해 봐야 할 상대도 그였다. 두 번째 전화에서 결례를 인정하고 다시 물었다. 차분해진 문 변호사는 “확인되지 않은 단계에서 죄를 만들려고 하지 말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법률가의 원론적인 문제 제기에 우리 법조팀은 보도를 유예했다. 다음날 비슷한 내용이 한 방송사의 특종으로 보도됐다.

2009년 봄,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의 기자들은 특종과 낙종을 오가며 특유의 조울증을 앓았다. 이인규 당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이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예고한 전 정권에 대한 사정은 법조 담당 기자들에게도 태풍 같았다. 그랬던 이 전 부장은 지난 2015년 당시 국가정보원의 ‘언론플레이’를 주장했다. 검찰의 수사 내용을 “논두렁에 시계를 버렸다”는 식으로 왜곡해 언론에 흘려 전직 대통령에게 망신을 줬다는 요지였다.

그 국정원은 지금 수사를 받고 있다. 2009년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을 ‘공작의 톱니바퀴’가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현재의 모습에서 8년 전의 행태가 오버랩된다. 이명박 정부 국정원의 기밀 문서와 박근혜 정부 청와대의 캐비닛 문건이 언론을 통해 쏟아지고 있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은 공식 석상에서 이런 흐름에 편승했다. 박상기 장관은 국정감사장에서 이 전 대통령 수사와 관련된 질문에 “수사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문무일 총장은 기자간담회에서 “수집된 증거를 갖고 외면하기는 어렵다”는 표현을 썼다. 원론적인 답변이라지만 국민들이 행간의 의미를 읽기는 어렵지 않다. 칼자루를 쥔 사람은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 말씀드릴 수 없는 점을 양해해 달라”고 ‘고구마 답변’을 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와 현재의 수사는 사건의 내용과 전개 상황이 다르다. 죄질과 국민적 공분의 수준도 천양지차다. 그렇다고 ‘잔인한 달’로 시작한 그 전철을 밟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답을 정해 놓고 달리는 것처럼 보이면 목적의 실질은 훼손된다. 적폐청산이 적폐를 닮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김승현 사회2부 부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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