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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오후 한 詩]모르는 사이/박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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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말이 없는 사람입니까 이어폰을 꽂은 채 줄곧 어슴푸레한 창밖을 내다보고 있군요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태운 7019번 버스는 이제 막 시립은평병원을 지났습니다 광화문에서부터 우리는 나란히 앉아 왔지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눈을 준 이 저녁이 조금씩 조금씩 빛으로 물들어 간다고
건물마다 스민 그 빛을 덩달아 환해진 당신의 뒤통수를 나는 몰래 훔쳐봅니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입니까 당신은

오늘 낮에 혼자 밥을 먹었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이 가득한 광장을 혼자 걸었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그곳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난 적이 있지요 언제 밥이나 한번 먹자 악수를 나누고서 황급히 돌아선 적이 있지요

나는 슬퍼집니다
당신은 곧 벨을 누르고 그렇고 그런 약속처럼 버스는 또 멈출 테지요
나는 다만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변덕스러운 오늘의 날씨와 이 도시와 도시를 둘러싼 휘휘한 공기에 대해 당신 무릎 위 귀퉁이가 해진 서류 가방과 손끝에 묻은 검뿌연 볼펜 자국에 대해

당신은 이어폰을 재차 매만집니다
어떤 노래를 듣고 있습니까 당신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그 노래를 나도 좋아합니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문이 열립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당신이 유유히 문을 나섭니다 당신의 구부정한 등이 저녁의 미지 속으로 쓸려 갑니다

우리는 헤어집니다 단 한 번 만난 적도 없이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내 이름은 소란입니다

아시아경제

■지극히 쓸쓸하고 애틋한 시다. 참 좋다. 보탤 말이 내겐 없다. 그런데 이 시 어디를 더듬어 보아도 평범한 문장들뿐이다. 그런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하지만 이 시 정말 좋다. 이런 시는 재주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과감히 말하건대 천부적인 재능 따위와도 상관이 없다. 어쩌면 오랫동안 고치고 다듬었겠지만, 그보다 더 오랜 동안 마음속에 쟁여 두고 때때로 꺼내 입안에서 굴리고 굴렸을 것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와 같은 범속한 문장들 하나하나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자꾸 그 안에서 겹겹으로 맴돌 수밖에 없는 까닭이. 오늘 저녁엔 한참 동안 길을 서성일 것 같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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