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회주의'로 이질성 혐오한 군부독재가 기원
민주화 과정에서 불교와 배타적 민족주의 결합도
불교국가 태국 남부에선 이슬람 분리주의 갈등
행복지수 불교왕국 부탄, 힌두교도 탄압과 추방
소승불교 스리랑카에선 종교내전 타밀족 진압
흔히 불교를 ‘자비의 종교’로 부른다. 하지만 국민 70%가 불교 신자라는 미얀마에서 최근 소수 무슬림(이슬람교도)인 로힝야족 추방사건이 터지면서 이미지가 흔들리고 있다. 이미 태국 남부와 스리랑카의 무슬림 분리주의 운동 탄압, 부탄의 힌두교도 추방이라는 유사 사건도 있었다. 불교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살펴본다.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국가자문역이 ‘21세기 홀로코스트’로 불리는 학살과 인권유린 주범이란 오명을 쓸 판이다.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과 2011년 미얀마 민주화 업적의 빛이 바래고 있다. 자신들은 ‘미얀마 소수민족’으로, 미얀마 정부는 ‘불법 이민자’로 부르는 로힝야족 탄압 때문이다. 로힝야족은 무슬림으로 인도 동부 언어인 벵골어를 쓴다. 180만~200만 규모로 78년 이전엔 대부분 미얀마 서부와 북부에 살았다.
파키스탄의 카라치의 주민들이 최근 아웅산 수치 미얀마 국가자문역의 사진을 불태우며 사위를 벌이고 있다. 무슬림인 로힝야족 추방사태와 관련한 항의로 보이다. 사진 아래에 '부끄러운 줄 알라'는 영문 구호가 적혀 있다. [EPA=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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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0만 인구의 미얀마는 버마족(68%)·샨족(9%)·카렌족(7%)·라카인족(4%)·몬족(2%)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135개 민족으로 이뤄진 다민족국가다. 하지만 로힝야족은 소수민족에도 들지 않는다. 1982년 군부가 만든 국적법에서 국민 기준을 영국 통치 이전부터 거주한 민족으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인도 동부 벵갈 지역에서 건너온 이민자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이들은 국민에서 제외되고 추방해야 할 '식민 잔재'로 분류됐다. 하지만 로힝야족은 자신들이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의 토착민족이라고 주장하며, 군사정권 이전엔 선거에도 참가했음을 상기시킨다.
불교국가 미얀마에서 추방당한 무슬림 로힝야족 난민들이 방글라데시 국경 지대에서 논 사이를 걸어 피란하고 있다.[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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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국가 미얀마의 무슬림 탄압 기원은 62년 쿠데타로 집권해 88년까지 지배했던 군부독재자 네윈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버마족과 불교를 우선하는 ‘버마식 사회주의’ ‘불교 사회주의’를 국정철학으로 내세웠다. 일당독재, 외국인 추방, 해외관광객 사절, 대외교역 단절, 엄격한 고립과 쇄국주의, 산업 국유화, 소수민족 억압 등이 포함된 그의 정책은 민주주의·인권 억압과 경제파탄을 불렀다. 군사정권은 78년 ‘외국인’ 로힝야족을 강제해 20만 명을 방글라데시로 밀어냈다. 91~92년엔 25만 이상이을 쫓아냈다.
미얀마의 불교 승려들이 지난 2015년 1월16일 유엔총회에서 소수 무슬림인 로힝야족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라고 권고하자 하으이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힝야족은 영국 식민지 시절 지금의 방글라데시인 발공 지역에서 미얀마로 이주한 것으로 지작되지만 이들은 불교국가 미얀마는 물론 이슬람국가 방글라데시에서도 시민권을 얻지 못하고 '나라 없는 국민'이 되고 있다.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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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로힝야족 탄압은 결국 군부독재의 잔재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민주화 이후에도 개선되지 않는 것일까? 일본 NHK방송은 “민주화 과정에서 불교와 연결된 미얀마 민족주의가 힘을 얻어 다수파의 소수파 탄압으로 이어진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아사히신문은 “일부 과격 불교 민족주의 단체가 민주화 이후 배타적인 이슬람 차별운동을 벌이면서 로힝야족을 테러리스트로 오도하고 있다”로 전했다. 82년 결성된 969운동이라는 이름의 불교민족주의 단체가 대표적이다. 이 단체는 200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바미얀 석불을 폭탄으로 파괴하는 반달리즘을 벌이자 자극을 받아 반이슬람운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아웅산 수치를 중심으로 한 민주세력이 선거로 권력을 얻었지만 지지세력 모두가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세력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불교국가 태국의 남부 지역은 불안하다. 말레이시아와 접한 이곳 주민의 다수는 태국어가 아닌 말레이어를 쓰는 무슬림이다. 이 지역에 있던 빠따니 이슬람 왕국을 짜끄리 왕조(현 왕실) 창시자인 라마 1세가 1795~1796년 정복한 뒤 1909년 영국-시암 협정으로 완전히 차지했다. 빠따니 주는 60만 인구의 88%, 나라티왓 주는 66만 인구의 82%, 얄라 주는 42만 인구의 72%가 무슬림이다. 이 3개 주는 분리 독립 움직임이 강해 2001년 대규모 소요사태에 이어 2004년엔 무장대원 100여 명이 정부기관을 습격했다. 2004년 이후 사망자가 6500명 이상 발생했다는 것이 방콕포스트의 보도다. 현재 1만~3만의 게릴라가 활동 중이며 태국군 6만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 불교국가 태국의 이슬람 분리주의 운동이다.
98년 헌법을 제정해 입헌군주제 국가가 된 히말라야의 불교왕국 부탄은 '행복지수'를 국정에 반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힌두교도인 네팔계 주민을 국민이 아닌 불법이민자로 간주해 차별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80년대 대대적인 박해로 10만 이상의 힌두교도가 이웃 네팔로 피신해 난민이 됐다. 89년부터 학교에서 네팔어 수업도 금지했다. 90년 힌두교도들이 권리보장과 민주주의 요구 시위를 벌이자 무력 진압했다. 당시에도 수천 명이 네팔로 피신했다. 92년에는 네팔계 주민에게 반정부 시위를 부추겼다는 이유로 부탄 인민당 대표를 종신형에 처했다. 네팔에 피신한 힌두교도 난민들은 귀향을 원하지만 부탄 정부는 거부하고 있다.
스리랑카는 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마자 대부분 불교도인 싱할리족(74.9%)과 힌두교도가 많은 스리랑카 타밀족(11.2%, 기원전 2세기부터 거주) 간의 갈등이 계속됐다. 스리랑카 타밀족은 1956·58·77·81·83년 봉기했으나 무력 진압됐다. 이후 이들은 ‘엘람(타밀어로 스리랑카) 타밀 해방 호랑이’라는 무장조직을 결성해 83년 7월~2009년 5월 25년이 넘게 내전을 벌였다. 내전은 스리랑카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6만~10만명 정도가 숨지고 최고 80만 명이 피란한 것으로 추산된다. 80만 명의 스리랑카 타밀족이 해외로 떠났으며 일부는 아직도 난민 생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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