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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숲으로 들어간 사람이 있다. 볼 수 없으므로, 보이지 않으므로 손을 더듬어 앞을 보고, 귀를 열어 사물의 위치를 파악한다. 분별할 수 없으므로 더듬더듬 내 몸의 안팎을 저울질하고, 불안정한 감정의 중심을 잡으려 한밤을 틈타 숲 밖으로 외출을 감행한다. 2010년 영남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하기정(1970~ ) 시인의 첫 번째 시집 ‘밤의 귀 낮의 입술’은 어둠(밤) 속에 나를 감춘 채 낯익은 감정을 낯설게 드러낸다. 쉽게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몽상과 화려한 수사법으로 감추고 있다.
숲의 소란들로 덫에 걸린 줄 알면서 뿔을 길렀지 일격에 받거나 가죽을 물어뜯을 송곳니를 세우면서 뿔을 키웠지 뿔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빨을 갈았지 각축을 벌이며 먹이를 겨냥한다고 생각했지 마냥 공격하는 자세로 방어하면서 그냥 빠져나올 줄 알았지 이빨을 받으려고 뿔을 물었지 꿈을 바꿀 때마다 새 뿔이 자랐지 그냥저냥 마냥 과녁이라 설정하면서 뿔이나 길렀지 이빨이 뿔인 줄 알면서 뿔이 이빨인 줄 알면서 소란을 키워갔지 덫은 도처에서 비 온 뒤 죽순처럼 뿔을 닮아갔지 내가 그린 꿈의 장면에서 컷을 외치며 뿔을 잘랐지 잠이 꿈인 줄도 모르고 꿈이 잠인 줄도 모르고
- ‘자각몽 –각자(角者)나 무치(無齒)나’ 전문
위 시에서 뿔과 이빨은 나를 지켜주는 동시에 나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반면 뿔과 이빨이 자라면서 생겨나는 ‘소란들’은 위험한 과녁이 된다. “덫에 걸린 줄 알면서 뿔”을 기르고, “송곳니를 세우”는 것은 먹이를 구하기 위함이므로 생존(가난)을 위하여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소란 또한 생존을 위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 즉 수모 같은 것이다. 하여 “공격하는 자세로 방어하면서 그냥 빠져나올 줄 알았”다지만 결국 ‘나’라는 덫에 걸리고 만다.
부제 ‘각자(角者)나 무치(無齒)나’에서 보듯, 뿔을 가진 자나 이빨조차 없는 것은 곧 나의 감정표현이다. “꿈을 바꿀 때마다” 돋아나는 뿔이 곧 감정의 표현인데, “덫은 도처에서 비 온 뒤 죽순처럼 뿔을 닮아”가므로 부작용만 양산한 모양새다. 내가 꿈을 꾼다는 것을 인식하며 꾸는 것이 자각몽이므로 감정을 키우거나 없애는 것도 결국 내 의지에 달려 있다. 숲도 소란도 다 내 감정의 범주에 속하는 영역이다. 잠(꿈)의 숲에서 뿔을 기르고 송곳니를 세우는 건 내 감정에 대한 도발이지만 자발적으로 “컷을 외치며 뿔”을 자르는 순간 모든 것은 허무하게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다.
접으면 나는, 날아가는 비행기
접으면 너는, 너라는 배
− 이 종이배를 밀고 바다로 나아가야 해
다리를 접으면 생기는 무릎
접으면서 주저앉는 의자
의지할 데라곤 여기밖에 없는데
− 이 통증을 베고 누워야 해
재채기 한 번 했을 뿐인데
우산을 접으면 줄줄 새는 물
나에게 아름다운 상처를 준
고양이의 발톱을 그러니까 사랑하자
이 고요한 은신처 안에서 비밀의 상자를
접는 일밖에는 빈 상자 안에
빈 상자를 채워 넣는 일 밖에는
두 점의 폐곡선이 만날 가능성보다
당신과 나란한 평행선이 만날 수 있기를
접는
- ‘접는’ 전문
사실 “숲의 소란들”은 발칙한 도발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안간힘으로 중심을 잡으려는/ 몸짓”(이하 ‘젠가의 모든 것’)이다. 규칙은 정해져 있고 “낯설고 위험한 세계를 더 좋아했다”지만 “상상 밖의 일은 의외로 아름답게 몰락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고요한 은신처”가 필요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이 종이배를 밀고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면서도 결국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고 “통증을 베고 누워” “나에게 아름다운 상처를 준/ 고양이의 발톱”을 사랑하자는 다소 허망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상상과 현실의 부조화로 “빈 상자 안에/ 빈 상자를 채워 넣”거나 “마트로시카를 하나씩 벗기며 나는 조금씩 작아”(이하 ‘그 자작나무 숲으로’)져 갈 뿐이다.
“창문을 열고 들어온 자작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하얀 방”이나 환한 자작나무 숲에 머물길 원하지만, 시인이 머무는 방은 불 꺼진 방이거나 캄캄한 숲속이다. “고요한 은신처”는 될 수 있겠지만 ‘나의 안식처’는 될 수 없다. 시인이 자꾸 어두운 방(동굴)으로 들어가는 것은 직접 만나고 싶지 않은, “나란한 평행선”으로 바라보고 싶은 ‘당신’이 자리하고 있다. “쫑긋거리며 접을 수”(이하 ‘다시 토끼를 기르는 일’) 없는 감정, 즉 “공생과 천적”의 관계인 당신과의 복합적인 감정이 내재되어 있다. 애증관계인 당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시인의 바른 심성 탓이다. “서로/ 밟히거나 물리지는 않”(‘정사(正事)’)도록 양보하고, 내가 빛나는 것은 “거울 속”에서나 있는 일이고, 복잡한 현재의 삶을 “신발이 큰 탓”으로 돌리고 있음이다. 그런 심성 때문에 끊임없이 중심을 잡으려 애쓰고, 전생을 더듬을 뿐 아니라 상처의 본질을 감추려 한다.
이에 시인은 “아름답다고 착각한 이 모든 불온한 불순물”(‘시인의 말’)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한다. “누가 적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제자리를 찾아 껴안을 수 있을까요”(‘야간등화관제’), “우린 서로에게 포크를 겨누었었나?”(‘단지, 과일이 먹고 싶은 밤’), “빈 소매를 펄럭이며 손을 잡는 일은 없겠지”(‘의류수거함’), “불안은 불안만 먹고 사는 편식의 대가입니까?”(‘돌연, 종이’)…. 어두운 곳에서 유리창과 구멍을 통해 세상과 소통을 시도하는 시인은, 이번 시집이 “질문이 너무 많은 답안지”(‘브로콜리’)임을 잘 알고 있기에 수시로 감정을 소환하고, 균형을 맞추려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다.
◇밤의 귀 낮의 입술=하기정 지음. 모악 펴냄. 152쪽/8000원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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