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18 (월)

[한국사의 안뜰] 양반·평민 함께한 마을계… ‘나눔의 정’ 300년을 이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55〉 무릉도원의 ‘요선계’ / 신선 놀다간 절경 ‘요선암’에서 마을 3개 성씨 모여 향촌 발전·번영 논의 / 입약 35개항에 오륜 지키며 살자는 사랑 담겨 / 지금도 남아 상호부조·장학 사업… 더불어 사는 공동체 실천

강원도 영월군 무릉도원면에는 ‘무릉리’와 ‘도원리’라는 마을이 있다. 강원도에서도 경치가 수려하기로 유명한 이 고장은 그야말로 신선이 살 만한 무릉도원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특히 무릉리 산193번지를 중심으로 하는 그 일대는 기암절벽이 절경을 이루고 그 밑으로는 맑은 강이 흐르는데, 강 아래의 넓은 바위에는 조선시대 중기 문인으로 유명한 양사언(楊士彦·1517~1584)이 쓴 요선암(邀仙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요선암’이란 ‘신선이 와서 춤추고 간 바위’라는 뜻이다. 여기에 천연기념물 제543호로 지정된 요선암의 아름다운 돌개구멍은 바위가 살아있는 듯한 절경을 만들어 관광 명소가 되었다.

세계일보

요선암에 모인 계(契) 조직을 요선계(邀僊契)라 불렀다. 사진은 요선계의 표지. 강원권한국학자료센터 제공


조선시대 요선암에는 수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다녀갔다. 이들은 요선정(邀仙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놓고 풍류를 즐겼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서 향촌의 발전과 자손들의 번영을 희구하면서 논의했다. 이곳 무릉도원리에는 원주이씨, 원주원씨, 청주곽씨의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요선암에 모여 계를 조직하고, 계의 이름을 요선계(邀僊契)라고 하였다. 요선계는 양반과 평민이 함께 한 마을계로 약 300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요선계는 지금도 봄, 가을로 일 년에 두 번씩 모임을 갖는다. 대표는 이씨, 원씨, 곽씨의 성 중에서 돌아가며 맡고, 임기는 2년이다. 계원들은 1년에 쌀 2말에 해당하는 금액을 회비로 내는데, 현재 10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선계는 오랜 세월 동안 안정적으로 운영하며 무릉리 산193번지 일대의 임야 4000평과 수천만 원의 회비로 상호부조 사업과 장학 사업 등을 하고 있다.

세계일보

요선계중수서문


요선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한 자료는 없다. 그러나 두 차례의 화재 이후 1744년에 새로 건물을 짓고 입약(立約)을 만들었던 자료만 현재 남아있다. 요선계의 입약은 35개항으로 되어있다. 입약 내용은 첫째, 국가와 백성을 위한 근본은 오륜(五倫)으로 이것을 잘 지켜서 국가를 융성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며, 가정을 안락하게 한다. 둘째,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하며, 부부가 화목하고, 동기 간에 우애가 두터운 가정은 상을 주며, 그렇지 못한 가정은 벌을 준다. 셋째,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무시하며, 다수가 소수를 능멸하며,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업신여기며, 어른이 어린이를 학대하며, 젊은이가 늙은이를 무시하고, 서자가 적자를 무시하며, 천한 자가 귀한 자를 무시하는 등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그 경중에 따라서 관(官)이나 마을에서 처벌한다. 넷째, 앞에서는 옳다고 하고 뒤에서는 비방하며, 다른 사람의 선을 감추고 과실만을 들추어내며, 작은 일에 논쟁을 벌이고 남을 중상모략하며, 유언비어나 조작하여 사회를 어지럽히는 자는 죄의 경중에 따라서 처벌한다. 지금 시대에 적용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정도로 구구절절 눈여겨볼 조항들이다.

세계일보

세계일보

조선시대 요선암(邀仙巖)에는 수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다녀갔다. 이들은 요선정(邀仙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사진 위쪽부터 요선정과 요선암. 문화재청 제공


결국 요선계의 목표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을 통하여 국가와 사회, 가정의 안녕과 평화를 지향했던 것이고, 요즈음 말로 더불어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자는 나눔과 사랑의 실천을 의미했다. 요선정에는 숙종과 정조가 짓고 써서 보낸 편액이 걸려 있다. 어제시편액(御製詩扁額)이다. 숙종은 영월로 유배된 단종을 복원시키고, 장릉(莊陵)을 추봉하는 등 단종의 유배 길을 비롯한 유배지의 지리와 역사를 살피던 중, 부근 주천면의 경치 좋은 곳에 두 개의 정자를 지어 시를 지어 보내고, 원주목사에게 현판을 만들어 달게 하였다. 그리고 뒤에 이 사연을 들은 영조가 다시 시를 지어 추가했고, 정조 또한 숙종의 시에 운자를 따서 시를 지어 원주목사에게 보내면서 편액을 하여 달게 했다. 정조가 원주목사에게 당부한 마지막 구절은 백성을 위하는 임금의 심정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관리들의 나태함과 무책임함을 경계하라는 말로 지금의 관리들도 귀담아들을 대목이다. 이 어제편액들은 원래 주천면의 정자에 걸려 있었는데, 1909년에 홍수로 정자가 떠내려가고, 편액이 일본인 수중으로 들어가자 요선계 회원들이 이를 다시 매입하여 요선정으로 옮겼다. 이 편액들은 현재 요선정과 함께 강원도지방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한편 요선계 문서 외에도 이와 관련된 호구단자와 호적대장인 ‘갑인인구성책(甲寅人口成冊)’이 남아있어 요선계 마을의 주민 구성과 생활 상태도 그려볼 수 있다.

세계일보

손승철 강원대학교 교수


조선시대 호적의 종류에는 호구단자, 호적중초, 호적대장이 있는데, 호구단자는 각 가문에서 일정한 양식에 의해 호주가 기록하여 관청에 제출한 것이고, 호적중초는 호구단자를 기초로 마을 단위에서 작성하여 제출한 것이다. 호적대장은 호적중초의 내용을 토대로 군현 단위로 최종적으로 작성됐다. 인구성책이란 호적대장에 해당하는 문서로, 인구조사를 위한 인구센서스의 통계로 보면 된다. 현재 무릉도원면과 관련된 고문서는 요선계 문서 외에 호적 관련 문서가 있다. 하나는 1849년에 작성된 이사국의 호구단자이고, 다른 하나는 1854년 수주면 2리의 인구성책이다. 인구성책은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기본으로 작성하였다. 오가작통법이란 5가구를 1통으로 묶어 호구파악, 유민발생, 범죄자 감시 등을 하기 위한 제도이다. 특히 유민이 발생하면 조세와 군역 대상자가 줄어들어 재정, 국방상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 인구성책은 전체가 15통으로 되어 있고, 각 통은 5호에서 6호로 구성하였다.

세계일보

인구성책표지


무릉도원면의 인구성책에는 이사국이라는 인물의 호적 정보가 있고, 동일인의 호구단자가 남아 있어 두 문서의 정확도를 비교해 볼 수도 있다. 호구단자에는 호주 이사국과 그의 첫째, 둘째, 셋째, 넷째 아들 내외들과 손자들로 총 10명이 호를 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인구성책에는 호구단자와 똑같이 10명이 기재되고 추가로 손자며느리가 기재되어 모두 11명이다. 손자가 성장하여 며느리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76호 중, 단 1호의 호구단자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당시 호구단자와 인구성책의 정확도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로 이 시기에도 인구센서스가 꽤나 정확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강원지역의 고서와 고문서를 수집·정리하여 DB로 구축하는 강원권 한국학자료센터 구축을 담당하고 하고 있다. 그런데 수집한 고문서를 DB화하는 과정에서 무릉도원면에 남아 있는 요선계문서와 호구단자, 인구성책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즉 인구성책문서는 요선계 마을에서 보존하고 있었지만, 이사국 호구단자는 지역의 다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였는데, 이것이 DB작업을 통해 한 마을에서 작성한 문서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각 지역의 자료가 DB로 구축되어 전통 시대의 살아 숨 쉬는 기록인 고문서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영월의 무릉도원 요선계 마을에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며, 한국사의 안뜰을 거닐어 본다. 그들은 함께 사는 즐거움, 나눔의 행복함을 지금의 우리들보다 훨씬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케케묵은 고문서 속에서 조상들의 지혜와 사람 냄새를 느낀다.

손승철 강원대학교 교수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 Segye.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