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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살림하는 재미를 알고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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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이런, 홀로!?

가사노동 아닌 살림



한겨레

뙤약볕 아래서 바삭하게 마른 침구는 달콤한 향을 풍긴다. 볕이 스며든 이불은 별것 아니지만 기분을 바꿔놓고 피로를 풀어주는 고마운 존재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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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를 위해서 노동을 해내는 것이다. 만약에 그 노동이 즉각적인 보답을 기대할 수 없고 타인의 인정을 받기도 어려우며 밑도 끝도 없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황정은의 장편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에는 고아가 된 주인공 자매를 위해서 6년간 도시락을 싸주는 이웃, ‘순자’가 등장한다. 직장인이 된 주인공은 직접 도시락을 싸면서 순자 아주머니의 ‘특별한 반찬도 없는데 정말 맛있던 도시락’을 떠올린다. 비결이 무엇이냐고 순자에게 묻자 그가 대답한다. “새끼를 먹여본 손맛이지.” 그들 자매가 선량한 어른으로 자란 것은 순자와 그의 아들이 베푼 사랑 덕분이었다. 그런 사랑은 골수에 사무쳐서 영원히 되새길 수밖에 없다.

이기적인 살림살이가 가능

문제는 언젠가는 그 사랑을 떠나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이다. 독립과 함께 얻은 것과 잃는 것이 명확하게 갈렸다. 얻은 것은 자유요, 잃은 것은 사랑의 손길이었다. 생존을 위해서 감당해야 할 최소한의 허드렛일을 해낼 능력도, 기술도 없는데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이제 나도 어른이라고 입으로만 떠든 것이 열없었다. 노동으로써 나를 사랑하는 방도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말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질풍처럼 방황했다. 그 모습은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에 등장하는 혼자서 대충, 혹은 그 이하로 살아가는 싱글과 다르지 않았다. 냉장고는 텅텅 비고 집안은 지저분하고 규율이라고는 없는 게으르고 궁상스러운 삶. 숨기고 살 뿐이지 남들도 속사정은 다 비슷할 것이라고 여겼다. 때로는 공상과학적인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가정을 이루거나 수입이 많아지면 다 해결되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처한 현실은 꾸준하게 퇴보했고 젊음으로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나에게, 순자가 되어 주기로 했다.

그러자면 ‘지겹고 힘든 가사노동’을 ‘살림’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알고 보니 싱글로 사는 것은 살림을 연마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혼자라서 적막할 때가 있긴 하지만 공간과 물자를 독점한다는 것은 상당한 장점이다. 내가 노동을 하면 그 혜택이 오롯이 나에게 주어진다. 착취당할 여지가 완벽하게 차단된, 자기 주도적이고 조금은 이기적인 살림살이가 가능한 것이다. 또 내 집에서 허용되는 나만의 원칙을 마음대로 정해도 된다. 이를테면 ‘샤워하기 전에는 침대에 들어가지 말 것’ ‘세탁물을 오염된 정도에 따라서 나누고 세탁할 것’ ‘집에 들어오는 대로 발을 씻고 맨발이 되거나 실내용 양말을 신을 것’ 등이 있다.

독립으로 잃은 ‘사랑의 손길’
홀로의 삶은 살림의 연속
부분과 전체가 유기체처럼 연결
시간 부족하면 ‘아웃소싱’도 방법

직접 하는 요리는 만족감 주고
잘 마른 침구는 수면 질 높여
청결하려면 잘 버릴 수 있어야
중요한 것은 자기만족과 애착


모든 일이 그렇듯 살림도 일단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단 천천히, 하나씩 시도해야 한다. 의식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식생활이다. 먹는 빈도가 가장 높으니까 말이다. 만약 해 먹는 데서 재미를 발견하면 가장 절실한 생존기술을 획득한 셈이다. 입에 맞는 일품요리 몇 가지만 할 줄 알아도 식생활은 크게 달라진다.

그런데 여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재료를 직접 고르고 레시피를 모방해서 만들어 보고 실패와 성공을 오고 가는 과정이 필수다. 부디 소질이 없다고 손을 놓지 말라.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단조로운 기타 집안일에 비하면 요리는 감각적이고 어느 정도 재미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발전하면 근사한 저녁을 차려서 나를 대접할 수 있고 친구들을 불러서 홈파티를 할 수도 있다.

식생활 다음으로는 수면의 질이 중요하다. 잘 자기 위해서는 침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침구 관리도 역시 무턱대고 해보는 식으로 시작했다. 예전에 엄마가 하던 대로 베개와 이불 커버를 자주 세탁하고 가능한 한 햇볕에 말렸다. 뙤약볕 아래서 바삭하게 마른 침구는 달콤한 향을 풍긴다. 볕이 스며든 이불은 별것 아니지만 기분을 바꿔놓고 피로를 풀어주는 고마운 존재다. 잘 마른 이불을 덮고 평소보다 훨씬 달게 잔 뒤로는 이불 빨래가 귀찮지 않았다. 어느샌가 겉옷도 밖에서 말리고 행주와 수건을 삶아 빠는 부지런을 떨게 됐다.

마지막 과제는 집안의 청결을 유지하는 것이다. 매일같이 쓸고 닦을 자신이 없다면 짐을 줄이는 것이 최선이다. 여기서도 싱글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지 타협하는 과정을 건너뛸 수 있어서 좋다. 마음만 먹으면 요즘 유행하는 ‘심플 라이프’를 당장 실행할 수 있다.

일단 쓸모없다고 결론이 난 물건은 과감하게 버리거나 기증하라. 그런 다음에 당연히 보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물건까지 한 번 더 의심하라. ‘이게 반드시 필요한가? 자리만 차지하는 게 아닌가?’ 하고 두 번 생각하면, 정리해도 되겠다는 용기가 솟을 것이다. 반드시 필요하고 매일같이 쓰이는 물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많지 않다. 대개는 불필요하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물건들이다.

식생활과 침구와 의류 관리, 청소까지 더하면 살림의 총량이 너무 많은 것 같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살림은 유기체와 같아서 부분이 전체와 연결된다. 예를 들어서 차려 먹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정리와 청결에도 민감하다. 한 가지를 잘하면 나머지 부분도 잘할 수 있고 이 또한 노동이므로 숙달되면 쉽고 빠르게 수행할 수 있다. 게다가 이제는 모든 살림을 손수 할 이유가 없다. 시간과 노동력을 투입하기 힘들다면 아웃소싱의 시대가 선사하는 편의를 누리고 안락함을 얻으라. 반찬 배달 서비스, 청소 서비스, 이불 빨래, 운동화 세탁, 무엇이든 가능하다. 살림하는 방법에 정답이라는 것은 없다.

집에 가고 싶어질 때

그러므로 살림에 점수를 매기는 것 또한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자기만족과 애착이다. 아무리 좋은 곳에 있어도 집으로 가고 싶거나 집이 그립거나 하는 애착이 자리 잡으면 살림에 더욱 공을 들이게 된다. 이제 나에게 집은 단출한 세간에, 손에 익은 그릇들이 포개져 있고 좋아하는 식재료가 기다리는 곳이 됐다. 살림에 재미를 느끼는 지금, 학자금 대출을 전부 갚았을 때나 혼자서 해외여행을 떠났을 때보다 더 완전한 어른이 됐음을 실감한다. 끝으로 살림에 관한 몇 가지 팁을 공유한다. 홀로족에게 평화가 깃들기를!

1. 혼자 살면 채소를 제때 소비하지 못하고 버리는 일이 많다. 신선도가 떨어진 채소로 피클이나 장아찌, 콘슬로를 만들자. 절임채소 만들기는 생각보다 쉽고 간단하다.

2. 냉장고에서 파, 마늘, 계란을 떨어뜨리지 말자. 비록 인스턴트를 먹더라도 맛과 영양을 더할 수 있다.

3. 주방용 가위는 고급으로 장만하자. 도마를 꺼내기 귀찮거나 칼질에 서툰 사람이라면 가위를 많이 쓰게 된다. 절삭력이 좋고 손잡이까지 스테인리스로 된 가위가 좋다. 분리해서 끓는 물에 소독할 수 있어서 위생적이다.

4. 무쇠팬을 쓰면 고기, 채소, 빵 무엇을 구워도 1.5배쯤 맛있어진다. 무겁고 관리하기 까다롭긴 하지만 구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하나쯤 장만해도 좋다.

5. 과일을 커다란 볼에 담아서 잘 보이는 곳에 두라. 천연 방향제와 인테리어 소품 구실을 한다. 또 오고 가면서 하나씩 집어 먹게 되므로 상하기 전에 다 먹을 수 있다.

6. 살림을 잘하려면 눈대중을 잘해야 한다. 손은 작으면 작을수록 좋다. 장을 볼 때마다 되뇌어라. ‘부족한 듯 조금만!’

7. 좋아하는 향이 나는 오일을 사두면 활용도가 높다. 불면증, 스트레스 완화에 도움이 되고 피부 트러블 치료제, 보습제, 천연향수 등의 역할을 한다.

8. 창틀은 청소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먼지가 쌓이는데도 내버려두기 쉽다. 물에 적신 신문지로 한 번 닦아낸 다음에 걸레질을 하면 청소가 훨씬 간편하다. 절대로 먼지를 방치하지 말라.

9. 책장이나 화장대 위, 수납장과 같은 공간을 한군데 골라서 집중적으로 꾸미고 조명을 달리해보라. 살림에 애착을 갖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All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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