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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Why]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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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엽의 이 노래를 듣다가]

조선일보

조선일보DB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박인희 '세월이 가면' 중

가을이다. 열망이 사라진 자리, 맑고 고요하다. 계절은 곧 비우고 떨구기 시작할 것이다. 이제 이별의 말을 준비해야 한다. 모든 것은 어디론가 뿔뿔이 떠나고, 고독이 가을의 대기를 채울 것이다. 북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내려오면 기억들은 저 먼 망각의 숲으로 불려가고, 그리운 것들은 낯선 어느 계절의 노래로 흩어질 것이다.

여름은 열렬했다. 햇빛은 거칠게 쏟아지고, 그 아래 모든 것은 온 힘을 다해 발돋움했다. 무성했던 우리 사랑도 그러했으리라. 저무는 계절, 사랑은 어디로 가는가. 높고 푸른 하늘 위로 문득 그리운 얼굴이 흐른다. 아득한 기억 저편에 서 있는 "그 사람 이름은 잊었다." 얼굴도 아련하다. 다만 슬픈 망각의 숲을 지나온 가슴에 "그 눈동자 입술"만 남았다. 그때, 그 눈동자는 젖어오고 입술은 떨렸던가. 잊지 못할 "가로등 그늘의 밤"에 사랑도 가로등 불빛 따라 흔들렸던가.

가을 닮은 목소리의 주인공, 박인희가 부른 '세월이 가면'이 어디선가 흘러나온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라는 저 짧고 외로운 문장 앞에서 잠시 옷깃을 여민다. "가고, 남는" 이 두 동사 사이에서 인생은 그저 힘겹게 머뭇거리다, 사랑은 겨우 몇몇 추억으로만 남는다. 그조차도 언젠가 지워질 것이다.

사랑이 거닐던 "여름날의 호숫가"와 "가을의 공원"은 설렘과 기쁨의 밀어로 반짝였다. 하지만 시간의 윤기는 금세 사라지고, 연인이 떠난 그곳은 어느덧 퇴락을 맞이한다.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하릴없이 추억의 책장은 넘어간다. 그리고 이 감상(感傷)의 취기를 돋우는 한 줄 가사가 이어진다.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이 문장엔 시간을 넘어선 영원을 향한 동경과 시간에 꺾인 체념의 빛이 섞여 오간다. 그 긴 여운이 가을의 쓸쓸함을 가로질러 아득한 어디론가 우릴 데려간다. 추억만은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과, 그것도 부질없으리라는 생각 사이에서 사랑의 잔영은 "내 서늘한 가슴에" 깃든다.

이 노래는 1956년 서울 명동의 한 술집에서 시인 박인환이 쓴 즉흥시에 작곡가 이진섭이 바로 멜로디를 붙여 완성됐다. 노래 내용만큼이나 탄생 배경도 더없이 낭만적이다. 즉흥시여서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의 언어라기엔 다소 성긴 부분이 있지만, 대신 한달음에 써 내려간 절박한 호흡이 살아있다.

나애심이 가장 먼저 부르고 이어 현인, 현미, 조용필 등이 차례로 불렀지만, 노래는 1976년 박인희가 불러 크게 알려졌다. 청아하면서도 이지적인 박인희의 목소리가 가사의 시정(詩情)을 제대로 살려낸 덕이다. 노래는 20년을 기다려 비로소 주인을 만나 제대로 쓸쓸해졌다. 문학소녀의 감성을 지니고 있던 박인희는 시인의 또 다른 작품 '목마와 숙녀'를 노래가 아닌 낭송만으로 크게 히트시킨 인연도 있다. 그래서 한국인에게 '목마와 숙녀'는 시집이 아니라 박인희의 성문(聲紋) 위에 새겨진 박인환의 대표시가 됐다.

박인환의 짧고 파란 많았던 삶은 그의 글만큼이나 시적이었다. 뛰어난 패션 감각에 서글서글한 눈매를 지녔던 '댄디 보이' 박인환은 이 노래 가사를 쓴 그해, 폭음(暴飮) 끝에 거짓말처럼 3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람은 가고 영원한 옛날만 남았다.

떠나는 것은 그만큼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의 배면(背面)은 고독이다. 이 가을, 쓸쓸하다고 수선 피우며 기웃거리지 말 일이다. 사랑이 떠난 "서늘한 내 가슴"으로 휑한 바람이 불어오더라도 기꺼이 맞을 일이다.

[이주엽 작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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