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
10년이 나에겐 30년 느낌
기자로 산 삶, 전생같아… 길은 걸으면 남지만 특종은 가물가물할 뿐
올레 관리 엄청난 정성
최소 年 5번은 예초하고 리본도 일일이 교체… 40代 여성 사고땐 6개월간 우울감 시달려
“올레는 원래 큰길에서 집까지 이어지는 좁은 길을 뜻해요. 아기가 집 마당을 벗어나 처음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기도 하죠. 누군가 올레를 나서서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 상상에서 제주올레가 시작됐습니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제주도립미술관 돌담에 몸을 기대고 있다. /제주=김형호 객원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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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된 소회는?
"내게는 적어도 20년, 30년은 더 된 일 같다. 심지어 기자로 산 날들이 전생처럼 느껴진다(그는 '시사저널'과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등을 지내며 23년간 언론사에 몸담았다). 특히 인터넷 매체에선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모든 매체와 경쟁해야 했다. 누군가 특종을 하면 '왜 우리는 못 했나' 하는 자괴감이 올라왔다. 그런데 올레길 내고부터는 단 한 번도 경쟁의식이나 좌절감, 불안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비슷한 길이 생겨도 '나도 그 길 걸어봐야지' 생각할 뿐이다. 내가 했던 몇 안 되는 특종은 나조차도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길은 사람들이 걷는 한 계속 남는다. 나로서는 영원한 특종을 한 셈이다."
―지난 6월엔 몽골에도 올레길이 생겼는데.
"예전엔 제주도 오는 사람들이 다 제주시, 중문, 서귀포 정도에만 머물렀다. 몇 백만 관광객이 와도 대규모 관광단지만 혜택을 누렸다. 올레길이 생기면서 실핏줄 경제가 살아났다. 시흥, 대평, 법환 같은 작은 마을에 길이 나면서 그 지역 점방과 민박집이 살아나는 거다. 이런 경제 모델을 다른 개도국에 전수하고 싶다. 베트남, 부탄에도 올레길 조성을 논의 중이다."
―그 지역 주민들과 함께 다니며 길을 내나?
"길은 그들이 먼저 찾아놓는다. 어느 지역이든 올레길을 내는 데 몇 가지 공유된 원칙이 있다. 나무 하나 베어내지 않는다. 있는 길을 잇고 사라진 길을 불러내며 끊어진 길은 이어준다. 그래도 길이 없으면 삽과 곡괭이만 이용해 길을 낸다. 이왕이면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나타내는 장소를 잇는다. 그렇게 주민들이 찾아놓은 길을 우리가 가서 실사한다."
―각 지자체에서도 올레길과 비슷한 길을 내고 홍보하지만 크게 인기 끄는 곳은 없는 것 같다. 관(官)에서 올레길 냈으면 이만큼 성공하지 못했을 거라 보나?
"성공은커녕 길도 못 냈을 거다. '왜 이 앞으로 지나가느냐'는 항의부터 시작해 주민들이 훨씬 많은 것을 요구했을 테니까. 결정적으로 유지·관리가 어렵다. 올레길이 해안가로 제주도를 거의 한 바퀴 도는 것과 다름없는데 이를 유지하려면 엄청난 정성이 필요하다. 아스팔트길을 피해 풀길로 길을 냈더니 1년에 최소 다섯 번은 예초를 해줘야 한다. 장마철에 우리 탐사대가 가장 무서워하는 게 멧돼지가 아니라 풀이다. 육지에서 온 여자들이 핫팬츠 입고 민소매 입고도 걷는 길인데 쓸리면 안 되니까. 조상 벌초보다 더 자주 베야 한다. 그 일을 각 읍면동에 맡겨봤는데 차가 들어갈 수 있는 대로변만 풀이 베어져 있더라. (올레길 이정표 역할을 하는) 리본만 해도 비바람에 찢겨 금방 나달나달해진다. 각 코스마다 자원봉사자 두세 명이 걸으며 일일이 없는 리본 달아놓고 해진 것은 갈아놓는다. 요즘은 사람들이 기념으로 리본을 떼어가기도 해 난감하다. 외지인은 리본 하나에 의지해 길을 걷는데 다른 사람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다."
―실제로 사고도 있었는데(2012년 7월 올레길을 걷던 40대 여성이 살해됐다. 유족은 제주도와 제주올레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으나 법원은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결했다).
"그 일 이후 6개월간 우울감에 시달렸다. 처음으로 이 일을 접어야 하나 생각했다. 40대 여자가 용기 내 혼자 여행 떠나서 첫 코스도 안 걸어보고 그렇게 됐으니…. 여행의 동기를 제공한 사람으로서, 길을 낸 책임자로서 쓰리고 원통했다. 우리도 어찌 보면 상주인데 공범처럼 취급받으니 더 가슴 아팠다. 마치 올레길이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처럼 보도한 일부 언론에도 배신감이 들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나?
"올레길 처음 낼 때 우리 어머니가 심하게 뜯어말렸었다. 자식 낳으면 출세시켜 육지 보내는 게 제주 사람들 꿈인데 이걸 거꾸로 되돌린다니 말이다. 그랬던 어머니가 '아무리 사람들이 몰아붙인다 해도 네 책임도 아닌데 왜 주저앉냐. 내 딸답지 않다'며 용기를 주셨다. 우리 어머니가 30년 넘게 가게 했던 시장이 '서귀포매일올레시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딸이 낸 길 이름이 당신이 평생 일한 시장에 붙으니 그때부터 딸의 일을 인정하기 시작하셨다. 요즘은 시장 내 제주올레 안내센터에서 자원봉사 하신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
"부산 사는 한 할머니가 79세에 올레길 처음 걷기 시작해 4년 만에 완주했다. 완주 마치고 우리 사무국 찾아와 감사하다며 기부금 내고 가셨다. 사람들이 본인이 걷는 동안 느낀 기쁨을 전부 우리 덕으로 돌린다. 감사하다는 말로만 치면 이미 난 재벌이다."
―다음 10년에 대한 구상이 있나?
"돌아가신 아버지 고향이 함경북도 무산이고, 어머니는 서귀포 살던 분이다. 목포에서부터 트럭 타고 아버지 고향까지 가는 게 늘 꿈이었다. 지금 남북 상황이 너무나 엄중한 시기이지만, 평화 국면으로 접어들면 말 그대로 한라에서 백두까지, 피스(peace) 올레를 내보고 싶다. 걷기가 어떻게 개인을 구원하는지 경험했기에 나온 구상이다. 길은 사람을 무장해제 시킨다." 인터뷰를 마치자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매일 이런 하늘을 보는 기분은 어떠냐'고 물었다. "제주 산다고 짜증 나는 일 없겠나? 그런데 하늘 보면 기분이 풀린다. '안 좋은 일은 입도세로 생각하고 말자' 한다."
[제주=유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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