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호의 의사도 사람]
자리 좋아야 병원도 성공… 목 좋은 곳 계약하려고 신분 밝히니 권리금 껑충
이 땅의 건물주님들 의사도 고생고생합니다
이 땅의 자영업자님들 고군분투 박수 보냅니다
장마도 지났는데 비가 자주 내리더니 병원 탕비실에 비가 샜다. 벽지가 다 들뜨고 병원 현관에도 비가 새 하얀 천장이 누렇게 변했다. 비 샌 것이야 별일 아닐 수도 있지만 누전이 일어날까 걱정돼 일단 현관 전구를 모두 빼 버렸다. 동네 병원에서는 전구가 나가도 원장이 직접 갈아야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건물주에게 연락했다. 건물주는 천장과 벽이 마르면 방수 처리를 다시 해주겠다며 미안해했는데 야속한 하늘은 건물이 마를 만하면 비를 또 내린다. 방수 비용이 다음 계약 때 월세 오르는 요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위치로 병원을 옮기기 전 자리를 보러 여러 군데 다녔다. 예전 의사 수가 적을 때에는 아무 곳에서나 병원을 열어도 환자들이 알아서 찾아왔다지만, 병원이 넘쳐나는 요즘엔 의사 실력보다 어느 곳에 있느냐가 병원 존폐를 좌우한다. 병원 성공의 세 가지 요소를 들자면 첫째가 자리이고 둘째도 자리, 셋째도 자리이며 실력은 그 후의 문제라는 어이없는 소리를 개원 앞둔 의사들이 한다고 하니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병원 입지를 구하다 보니 괜찮은 자리가 있었다. 2층에 있던 호프집이었다. 동네 시장 어귀에 있어 오가는 사람도 많았고 시장 안 상인도 많아 고정 환자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호프집 주인이 가게를 내놓은 것이 아니어서 손님인 척 몇 차례 드나들었는데 장사가 썩 잘되는 것 같지 않았다. 근처 부동산에 가서 그 호프집 보증금과 월세를 물어보고 혹시 가게를 내놓을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무엇을 할 것이냐는 건물주 말에 PC방이나 해 보려 한다고 얼버무렸다. 며칠 뒤 건물주에게서 연락이 왔다. 권리금 얼마를 내면 가게를 넘기겠다고 했다.
보증금과 월세, 권리금이 적당했기에 그 자리에 병원을 열기로 결정하고 부동산에 갔다. 병원을 차리려 한다고 사실대로 말하고 계약을 주선해 달라고 했다. 며칠 뒤 건물주에게서 또 연락이 왔다. 애초 얘기했던 금액은 모두 무효고 보증금과 월세, 권리금을 50% 더 받아야겠다고 했다. 병원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받아야 된다고 했다. 병원이 들어오면 월세 밀릴 걱정도 없고 건물 인지도도 올라가 같은 건물 다른 업소들도 혜택을 보지 않겠느냐고 설득해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결국 "의사가 봉이냐"는 말까지 해가며 대판 싸우고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건물주는 돈 많이 버는 의사가 쩨쩨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사도 빠듯한 돈으로 장소를 빌리고 사람을 고용하고 남들 다 쉬는 토요일은 물론이고 때론 밤늦게까지 환자를 진료하면서 병원을 꾸려간다.
비교적 넉넉하다는 의사도 이런 처지인데 일반 자영업자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국 내 의견을 존중해주는 마음씨 좋은 건물주를 만났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을 것이다. 사람 사는 것은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 서로 존중해준다는 느낌을 받을 때 원활하게 돌아간다.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자영업자에게 성원을 보낸다. 그나저나 이번 주말에는 방수 공사를 해야 할 텐데.
[송태호 송내과의원 원장·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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