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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화엄사 대웅전 타오르는 용그림에서 영감 떠올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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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 연필로 용과 여인 그리는 박소빈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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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빈 화가.


그는 연필로 그리기(드로잉)를 할 때면 “마치 굿판에 선 무당이 된 기분”을 느낀다. 작가 박소빈(46)은 검은색 연필로 ‘용과 여인’만을 그리는 화가다. 드로잉 작업은 단순하고 시간도 많이 드는 노동이다. 그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선들을 서로 교차시켜 용과 여인을 그려 주술적 창작세계”를 펼치고 있다. 그에게 연필은 어쩌면 “자기 안의 자기를 마주하게 하는 도구”다.

그는 오는 23일부터 10월22일까지 중국을 대표하는 베이징 진르(금일)미술관 본관에서 초대전을 연다. 초대전을 여는 게 까다롭기로 소문난 진르미술관 본관에서 한국의 젊은 화가가 작품을 선보이는 것은 처음이다. 6년 전부터 중국에서 활동 중인 박 작가를 1일 광주에서 만났다.

“신성하게 생각하는 용을 아날로그적 도구인 연필로 세밀하게 그리는 것에 놀라는 것 같아요. 한국 미술을 중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길 기대합니다.” 베이징 포스 갤러리 전속 작가인 그는 이 전시회에서 대형 작품 12점을 선보인다. 작은 검은색 연필만으로 용과 여인을 신비롭고 마술적으로 드로잉해 사랑과 꿈, 평화, 치유, 신화를 표현했다.

용 그림을 만난 것은 20대 때 전남 구례 화엄사에서였다. 박 작가는 “대웅전을 타고 오르는 용의 그림에서 전광석화처럼 예술적 영감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충남 서산의 부석사엔 의상 대사와 그를 흠모했던 당나라 선묘(산먀오) 낭자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선묘 낭자는 10년 만에 신라로 돌아가는 의상 대사를 만나러 갔지만, 배는 이미 바다로 떠난 뒤였다. 선묘 낭자는 ‘용이 되게 해달라’고 빌고 바다에 몸을 던졌고, 용이 된 선묘 낭자는 의상이 탄 배를 보살폈다. 그는 “중국인 친구들에게 의상 대사와 선묘 낭자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해주면 ‘정말이냐?’고 물으며 깜짝 놀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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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의상 대사와 당나라 선묘 낭자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소재로 박소빈 화가가 창작한 작품 <부석사 설화>. 박소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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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초대전의 백미는 연필 드로잉 퍼포먼스다. 전시장 벽에 가로 15m, 세로 4m 규모의 종이 앞에서 불화를 그리는 화공처럼 용의 비늘과 여인의 머리칼 한 올 한 올을 세밀하게 스케치한다. “의상 대사와 선묘 낭자의 사랑 이야기를 벽면에 담으려고 해요. 그림을 보면서 두 나라의 오랜 ‘인연’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현장 드로잉 퍼포먼스는 2005년 광주시립미술관이 뉴욕 퀸스미술관에서 펼친 기획전시 때 선보인 뒤 12년 만이다. 이번 초대전 땐 “긴 시간을 요하는 꼼꼼한 과정을 거쳐 용이 승천하는 것 같은 작품을 완성하는 모습”을 담은 비디오 영상도 소개된다.

21일부터 중국 진르미술관 초대전
위민젠 등 배출한 중 대표 미술관
가로 15m 연필드로잉 퍼포먼스도
“의상·선묘 사랑 얘기 그릴 것”



뉴욕 미술관서 두차례 초대전도
이징 포스갤러리 전속 활동중

“진르미술관 본관에서 초대전을 여는 것은 작가로선 큰 영예지요. 중국 최고의 미술평론가 황두가 쓴 ‘박소빈 드로잉 작업’이라는 평론이 본관에서 전시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진르미술관은 위민젠, 장샤오강 등 중국을 대표하는 현대작가들을 배출한 곳으로,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 고 백남준 선생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 진르미술관 알렉스 가오 관장은 “박 작가의 회화들은 아시아의 신화와 현대적 페미니즘 사이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고 그를 초대한 이유를 밝혔다.

“연필 드로잉을 택했을 때 주변에선 전업작가로서의 길을 걱정하신 분들이 많았어요.” 그는 목포대 미술대를 나와 조선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제 작품이 팔리지 않더라도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겠다고 생각했어요. 전시회에 온 지인이 ‘용 그림 대신 소나 한마리 그려달라’고 해 상처를 받은 적도 있어요.”

젊은 작가의 ‘독특한 표현 기법과 소재’를 눈여겨본 것은 뉴욕의 전시기획자 엘가 위머와 큐레이터 설라이아 브라초펄러스였다. 이들은 2006년 광주비엔날레에 왔다가 광주시립미술관 입주작가 작업실을 방문해 박 작가가 그린 ‘용과 여인’을 보고 경탄했다. 그리고 뉴욕 텐리 갤러리(2007)와 첼시아트뮤지엄(2009년)에서 초대전을 여는 기회를 얻었다. 저명한 예술잡지 <아트 인 아메리카>(2010년 5월호)엔 “선묘가 만들어내는 검은 물결은 드라마틱한 작품의 분위기를 만들어, 보는 이를 압도한다”는 내용으로 박 작가 작품 평이 실렸다.

‘현대미술의 심장’ 뉴욕을 거쳐 용과 여인은 유럽으로 향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2014년)에 이어 2015~2016년엔 그리스에 소개되기도 했다. “연필이라는 단순한 도구로 출발했지만, 프레스코(벽화 그리는 화법)에서 움직이는 이미지까지, 판화에서 ‘액션 페인팅’까지의 요소들을 흡수하고 융합하는 실험을 하고 있어요. 저만의 상상력으로 ‘박소빈다운’ 작품을 창작해 세계시민들과 소통하고 싶어요.”

광주/글·사진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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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뉴욕 전시회 때 현장 드로잉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박소빈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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