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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요구 잔뜩, 부담은 NO…위기 부르는 `시민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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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지난 3월 여성환경연대는 강원대에 의뢰한 연구용역 보고서를 바탕으로 "생리대 10종에서 유해물질이 검출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체 유해성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이 같은 결론을 낸 것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더군다나 10종 중 유독 릴리안 생리대만 언론에 공개되면서 다른 업체와의 공정성 시비도 잇따랐다.

놀라운 것은 관리감독 주무부처인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처신이었다. 사태를 방관하던 식약처는 지난 4일 여성환경연대 연구용역 자료를 그대로 공개했다. 일부 시민단체에 휘둘린 정부 부처가 사회적 갈등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촛불 민심'으로 탄생한 문재인정부가 출범한 지 4개월여가 되면서 '정부·시장실패'를 초래할 수도 있는 '시민실패'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최근 불거진 생리대 사태는 한 단면에 불과하다. 종국에는 반대 명분마저 불투명해진 '묻지마식 투쟁'으로 14개월을 끈 사드 배치 반대와 국가 에너지 대계(大計)를 고려하지 않는 탈원전 정책, 장기적인 재원마련 대책이 불투명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등이 모두 그런 예에 속한다. 국민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주요 정책들이 좌충우돌을 거듭하고 있다. 일부 시민세력에 휘둘린 '줏대 없는 정부'가 적절한 여건 조성과 치밀한 계획, 꼼꼼한 의견수렴 절차를 건너뛴 탓이다.

과도한 댓글 공세와 장애인학교는 물론이고 소방서·노인시설·화장품연구소·행복주택조차 반대하는 '님비(NIMBY) 현상'도 같은 맥락이다. 시민의 이름을 빌려 정책과 여론을 호도하려는 불순한 시도가 판치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시민실패가 궁극적으로 정부·시장실패에 이어 국가실패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잘못된 의사결정에 따른 대가는 일정 시간이 흐른 뒤 국가·국민 전체가 뒤집어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출간한 저서 '국가재정의 정치경제학'에서 '시민실패'의 위기를 진단한 오연천 울산대 총장은 최근 매일경제 기자와 만나 "국민들이 안고 있는 기대와 부담에 대한 이중적인 인식이 이 같은 시민실패를 낳는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유권자 표심을 얻기 위해 각종 복지정책 등을 쏟아내면서 정작 국민이 부담해야 할 몫에 대해선 침묵하는 정치권과 정부의 행태가 이 같은 시민실패를 부추긴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한국은 좌우 이념을 지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시장실패와 정부실패를 시계추처럼 반복해 왔다. 시장의 효율성과 낙수 효과에 기대다 양극화와 불평등을 낳았고, 과도한 정부 개입에 따른 비효율과 정경유착으로 국가를 망쳤다. 이때마다 정치권과 학계는 시민의 정치참여 확대를 대안으로 꼽았다. 하지만 정작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직접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국가의 구성원인 시민들이 단순한 유권자를 넘어 국가 거버넌스의 한 축으로 부상한 이면에서 '시민실패'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촛불민심과 여론에 기대어 무리한 정책을 강행하고, 국가운영에서 정교한 분석과 예측보다 민심을 자극할 이벤트 연출에 신경 쓰는 한탕주의가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문재인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178조원에 달하는 복지정책을 내놓으면서도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대한 '부자증세' 28조원을 제외하고는 늘어날 국민 부담에 대해선 애써 외면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건강보험 보장성을 높이는 '문재인케어'도 5년간 30조6000억원이 필요하지만 건보 적립금 21조원을 당겨쓰는 것 외에 국고 지원 방안이 부족하다. 또한 탈원전 정책에 따라 원전 해체와 전기요금 인상으로 국민 부담이 급증할 것으로 예측되지만 정부는 제대로 된 추계조차 내놓지 않고 있다.

구정모 한국경제학회장은 "대증요법적인 정책들은 부담이 돌아갈 일부를 제외하고 혜택이 돌아갈 다수가 찬성하기 때문에 손쉽게 결정된다"고 밝혔다.

오 총장은 시민실패를 극복하기 위해선 "정부가 비용과 혜택에 대한 정보를 국민들에게 숨김없이 제공한 뒤, 정책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작정 복지정책 확대나 소득주도 성장을 서둘러 밀어붙이기보다는 각 정책의 장단점을 국민들에게 정확하게 밝힌 뒤 국민들이 '성장'과 '분배' 가운데 한국 경제의 미래를 선택할 수 있도록 수순을 밟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대의기구의 영향력 회복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김동욱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사회 공론화는 이익집단을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어 더 큰 정책실패를 낳을 수 있다"며 "의회 정치와 국회, 입법에 우선순위를 두고 국정운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용어 설명>

▷시민실패(Citizen Failure) : 시민 이익 대변을 자처하는 일부 시민단체 등의 무책임하고 과격한 주장이 정부와 시장의 기능을 왜곡·퇴행시켜 국가적 실패를 초래하는 현상.

[전정홍 기자 / 이승윤 기자 / 나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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