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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 (수)

'트로이의 여인들' 김금미, 싱가포르에서 토해낸 한(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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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트로이의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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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미


【싱가포르=뉴시스】이재훈 기자 = 트로이의 마지막 왕비인 헤큐바 역의 김금미는 사자후를 토해내듯 한(恨)과 에너지를 쏟아냈다.

전쟁 중에 남편은 물론 모든 아들들을 잃고 딸과 며느리들마저 첩과 노예로 보내야하는 운명 앞에서 울부짖는 그녀에 대해 단순히 오열이라는 수식은 부족했다.

지난 7~9일 밤 싱가포르 빅토리아 극장에서 공연한 국립극장(극장장 안호상) 전속단체 국립창극단(예술감독 김성녀)의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가장 박수를 많이 받은 이는 김금미였다.

첫날 공연이 끝난 다음날인 8일 싱가포르 호텔에서 만난 김금미는 3일 동안 객석이 매진됐다는 소식에도 아쉽다고 했다.

그녀는 "사흘은 싱가포르 관객들이 '트로이의 여인들' 매력을 알기에는 너무 짧다. 더 많이 공연해야 한다"며 웃었다.

김금미는 '트로이의 여인들'의 70% 가량에 출연하면서 극을 이끌어간다. 공연 전에도 수차례 리허설을 온몸으로 소화했는데 피곤하다거나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헤큐바는 극의 마지막 부분에 무대의 맨 꼭대기인 단 위에 올라가 자신들을 벼랑 끝으로 모는 신을 향해 두 팔을 들고 도전한다. 김금미는 그 장면에서 집중하고 긴장한 탓에 올린 팔이 쉽게 내려가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

"시작부터 에너지를 85% 정도로 올려놓고 시작하는 작품이에요. 마지막에서는 150%가 되는 거죠. 헤큐바가 마지막에 신에게 도전하는 부분에서는 몸이 막 바르르 떨리고, 심지어 반이 쪼개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싱가포르 연출가 옹켕센이 연출한 이 작품은 싱가포르 예술축제에 초청 받았다. 지난해 11월 '트로이의 여인들'이 한국에서 초연할 당시에도 김금미에 대한 세간의 평은 호평 일색이었다. 특히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여인의 강인함이 그녀의 목소리와 몸으로 표현됐다.

김금미는 싱가포르에서 공연은 그 감정의 테두리가 더 넓어진 것 같다고 했다. 그녀는 "방에서 나무를 가꾸다가 들판에서 가꾸는 것 같다. 드넓은 곳에서 감정에 부딪히니 캐릭터에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헤큐바는 비극의 여인으로만 생각했어요. 근데 나라를 지키려고 하는 한 나라의 여왕이더라고요. 비운이라는 해석으로만 캐릭터를 보는 건 평이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녀의 위엄을 위해 흐트러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트로이의 여인들'의 주요 캐릭터에는 저마다 주제 악기가 있다. 헤큐바는 보통 남성의 악기로 여겨지는 거문고다. 이 악기의 묵직함은 헤큐바와 김금미의 카리스마를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김금미는 "이번에는 장단이 다 빠지고 캐릭터의 음악적 효과만 가져와 소리꾼이 색깔, 에너지, 박자를 다 계산해야 했다"면서 "힘들다기보다는 음악가로서 완벽하게 소화해야 할 자신과의 싸움이었다"고 했다.

김금미는 이미 매번 캐릭터와 싸워야 했다. 창극 '아비. 방연' '장화홍련' '메디아' '단테의 신곡'에서 강렬함은 그녀의 몫이었다.

성창순·김영자를 사사했고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인 김금미는 유명한 국악가 집안 출신이다.

남도민요 '육자배기'의 대가 김옥진 명창이 외할머니, 현재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이자 '여성국극의 대모'로 통하는 홍성덕 명창이 어머니다. 김금미의 딸 박지현도 소리에 입문, 창극 '아비. 방연'에 출연하기도 했다.

한국무용을 먼저 접한 김금미는 1990년대 여성국극의 대표적인 배우였다. 현재는 거의 잊혀진 여성국극은 창극의 갈래로, 오직 여성 연기자들만 무대에 설 수 있는 한국 공연예술역사에서 독특한 공연 장르다.

이 장르의 부활을 위해 힘쓰고 싶다는 김금미는 여성국극 '춘향'과 '황진이'로 1990년대 미국 투어와 호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어머니의 권유로 뒤늦은 나이인 25세부터 판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199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했다. 2007년 전주대사습놀이 명창 부문에서 장원을 차지하며 소리로도 탁월한 실력자임을 증명했다.

"피는 못 속이는 것 같아요. 소리가 쉽게 받아들여지더라고요. 뱃속에 있을 때부터 들어온 소리이니, 저도 모르게 뼛속 깊이 배어 있었고 엄마를 통해서 음정이라는 것이 생활화됐어요."

김금미는 전통적인 창극부터 안호상 국립극장 극장장·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이 만든 새로운 창극까지, 이 장르의 변화 한 가운데 서 있는 소리꾼이다.

유연하기로 소문난 김금미는 이런 변화가 낯설거나 어렵지 않다고 했다. 그녀는 "여성국극을 통해 다양한 장르를 이미 접했거든요. 무엇보다 전통은 물의 흐름처럼 가지고 가야 해요"라고 말했다. '트로이의 여인들'의 헤큐바는 김금미의 경험과 연륜 그리고 개방적인 태도가 똘똘 뭉쳐져 만들어진 그녀의 정수인 셈이다.

국립창극단의 차기작인 차범석의 '산불'(연출 이성열·작곡 장영규)에서 사납고 억센 여성 최씨를 연기하는 김금미는 "다양한 창극을 통해 제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발휘할 수 있어 행복하다"며 웃었다. "힘든 역할이나 많은 연습은 상관 없다. 만족할 만한 연기나 소리를 보여주거나 들려줬는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창극 출연과 동시에 판소리 5바탕 완창에 도전 중인 김금미는 지난해 수궁가를 들려줬다. 내년에는 심청가가 예정됐다. "예술을 하는 사람은 자세가 중요해요. 한시라도 치밀하게 준비하고 활동해야죠"라며 시원스레 웃었다.

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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