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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디지털 제국 구글의 리더 래리 페이지Larry Page 그의 첫 질문,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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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은 정확히 무엇을 하는 회사일까? 검색 엔진, 인공지능, 안드로이드 등등 다 맞지만 그 어느 것도 구글을 100% 설명하지 못한다. 구글은 ‘미래를 여는 기업’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과감한 시도로 10년 후, 그리고 더 먼 미래의 인류에게 선물을 안기는 것이다. 그 구글의 핵심이 바로 구글 지주사 알파벳의 CEO 래리 페이지(Larry Page)이다. 그는 구글의 창업자이며 동시에 구글로 대표되는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세계를 이끄는 리더이다. 그의 리더십은 의외로 교과서적이다. 바로 ‘혁신은 소통이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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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지배자

2003년 미국방언협회는 ‘구글링(googl ing)’을 ‘검색하다’라는 뜻의 동사로 인정했다. 원래 구글링은 ‘구글에서 검색하기’라는 뜻이었다. 또한 ‘구글라이제이션(googlization)’이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이는 구글이 IT산업에 끼치는 영향력을 가리키는 말로 구글이 이끄는 디지털 혁명을 뜻한다. 또 있다. 2006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세계경제포럼이 열렸다. 해마다 전 세계 기업인, 정치가, 학자들이 참여해 현상을 진단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이른바 ‘현자들의 모임’이 바로 다보스 포럼이다. 당시 클라우스 슈왑 포럼 회장은 의미심장한 발언을 햇다.

“전 세계는 이제 글로벌라이제이션에서 구글라이제이션으로 움직이고 있다.” 즉 전 세계인들이 구글을 통해 정보를 이용하는 것이 현실이며 이것이 바로 세상을 바꿔가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2014년 11월27일, 유럽연합의회는 구글 분할 권고안을 통과시켰다. 이 안은 구글의 사업을 분리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법적인 효력보다는 상징적인 조치로 구글에 대한 공포를 나타낸 셈이 되었다. 이처럼 유럽이 ‘구글포비아(googlephobia)’를 갖게 된 것은 약 90%에 육박하는 구글 의존도에 있다. 또한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가안보국(NSA)의 사찰 프로그램을 폭로하며 구글의 검색과 지메일을 통해 미국이 유럽의 모든 정보를 안방처럼 들여다 볼 수 있다고 밝힌 것에 대한 우려이다.

우리는 구글을 단순한 검색엔진으로 알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구글은 우리 생활, 특히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분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구글은 미국 온라인 검색 광고 시장에서 약 77%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으며 페이스북과 함께 모바일 광고 시장의 56%를 장악하고 있는 IT공룡이다. 숫자로 풀어보면 구글의 위력을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구글의 주가는 1000달러를 오르내리고 있으며 구글의 시가총액은 전 세계 모든 기업을 통틀어 애플의 약 8200억 달러에 이어 약 6800억 달러, 한화 753조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더 확실한 비교치가 있다.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이 약 2990억 달러 수준임을 감안해보자. 투자의 신이라 불리는 워런 버피의 버크셔 해서웨이, 다국적 기업 존슨&존슨, 세계 최대의 정유회사 엑손모빌을 능가하는 규모이다. 이뿐이 아니다. 구글은 현재 구글로 검색 시장을, 구글 애드와 구글 센스로 광고 시장을, 자회사인 유튜브로 동영상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게다가 모바일 운영체계의 약 86%를 점유하며 이 운영체계가 탑재된 기기만 약 20억 대가 판매된 안드로이드의 소유자이다.

구글의 확장력은 상상력을 초월한다. 2015년 구글은 조직개편을 통해 구글 알파벳을 세상에 내놓았다. 구글 알파벳은 검색, 모바일, 광고, 인공지능 등을 담당하는 구글, 헬스케어, 바이오 담당 칼리코(Calico), 사물인터넷과 스마트홈 담당 네스트(Nest Labs), 자율주행차 웨이모(Waymo), 이동통신사업 담당 파이버(Fiber), 기업용 인공지능 담당 딥마인드(Deepmind), 벤처 투자 캐피탈지(Capital G), 미래 사업 연구의 엑스(X) 등에서 완벽하고도 독립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구글의 식욕은 상상 이상이다. 구글은 자율주행 자동차, 드론, 스마트 콘택트렌즈, 생명과학, 스마트섬유, 우주사업 등에 진출했다. 이 같은 다양한 도전을 위해 구글이 창사 이후 지금까지 사들인 신기술 벤처기업이 총 200여 개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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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 페이지 2009년 연설 모습 사진 Stansfield PL by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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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제국을 건설하려는 구글의 구심점은 바로 44세의 래리 페이지이다. 그는 구글의 미래 전략과 운영을 총괄하며 현재 구글 지주사인 알파벳의 CEO를 맡고 있다. 이 은둔형 천재의 시작은 미약했다. 19년 전, 스탠퍼드대학 기숙사에서 시작해 친구의 집 차고에서 창업할 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심지어 래리 페이지 본인조차 구글의 현재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래리 페이지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천재적이고 기상천외한 아이디어와 이 아이디어를 실현시키는 강한 실천력으로 세계 최고의 기업 구글을 창업했고 그 보상으로 약 400억 달러의 자산가가 되었다. 구글의 직원들은 말한다.

“래리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는 마치 미래에서, 미래의 우리가 어떤 모습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온 사람인 것 같다”고. 래리 페이지는 항상 말한다. “우리의 10년 후를 변화 시킬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 피곤한 천재가 있어 구글은 현재의 제국을 세울 수 있었다. 그의 리더십을 찾아보자. 래리 페이지의 리더십은 사실 ‘구글 창업 정신과 사훈’ 그리고 ‘구글 십계명’에 녹아 있다.

래리 페이지는 세르게이 브린과 공동 창업을 하면서 “세상의 모든 정보를 한 곳에 집대성해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가장 유명한 사훈인 ‘악하게 굴지 말라Don’t be evil’를 만들었다. 물론 이 사훈은 구글의 탐욕스런 독점과 확장의 부메랑이 되고 있다. 또한 십계명은 다음이다.

1.사용자에게 초점을 맞추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온다.

2.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3.느린 것보다 빠른 것이 낫다.

4.인터넷은 민주주의가 통하는 세상이다.

5.책상 앞에서만 검색이 통하는 것은 아니다.

6.부정한 방법을 쓰지 않고도 돈을 벌 수 있다.

7.세상에는 무한한 정보가 존재한다.

8.정보의 필요성에는 국경이 없다.

9.정장을 입지 않아도 업무를 훌륭히 수행할 수 있다.

10.대단하다는 것에 만족할 수 없다.

2001년 영입한 CEO 에릭 슈미트에게 회사 경영권을 넘기고 2011년 구글의 CEO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10여 년간 래리 페이지는 은둔의 세계에 머물렀다. 그래서 그에 대한 편견과 예단도 많다. ‘스티브 잡스처럼 괴팍하고, 사교성이 없다’, ‘그가 괴짜라 구글에는 괴짜들만 모여 있다’ 등등. 하지만 래리 페이지는 그 10년 동안 구글의 미래와 인류의 미래를 설계했다. 그러면서도 구글의 모든 직원, 엔지니어들과 교감하며 ‘소통과 실천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20대 창업 신화의 주인공, IT업계의 기린아, 혁신 아이디어의 원천, 일확천금을 거머쥔 청년 재벌, 상상 공장의 공장장, 이상한 돈키호테, 스티브 잡스를 잇는 뉴 리더십 주인공 등등 래리 페이지를 설명하는 말은 많다. 그중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할 것은 바로 그의 도전 정신이다. 래리 페이지가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실패는, 대담하게, 담대하게 도전하지 않는 것이다. 회사가 실패하는 이유는 야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흉내 낼 수 없는 리더십의 실천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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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 페이지, 운명의 인물 3명을 만나다

래리 페이지는 1973년 미국 미시건 주 이스트랜싱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미시건 주립대학 컴퓨터공학 교수였으며 어머니 역시 컴퓨터 전문가였다. 페이지는 어려서부터 과학책이 넘쳐나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6세 때 처음으로 컴퓨터를 갖고 놀기 시작했고 초등학교 때는 컴퓨터로 숙제를 해오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이런 과학적 사고에 익숙한 환경에서 자란 래리 페이지가 처음 마주친 운명적인 인물은 바로 니콜라 테슬라이다. 이 헝가리 출신 과학자의 발명은 위대했다. 그는 전자전기기술을 혁명적으로 발전시킨 인물이다. 특히 테슬라는 교류전기 시스템을 발명했으며 이 특허를 개방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혜택을 준 인물이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역시 그를 존경해 회사이름을 테슬라라고 지었다. 래리 페이지는 니콜라 테슬라의 평전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 그처럼 세상을 바꿀 혁신적인 발명가가 될 꿈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안타까워했다. 위대한 발명가였지만 상업적 성공에 실패해 평생을 어렵게 살았던 점을 래리 페이지는 훗날에도 자기 일처럼 아쉬워했다. 래리 페이지는 미시건대학 컴퓨터공학과를 진학한다. 그곳에서 래리 페이지는 전국 대학교 전기공학, 컴퓨터공학 우등생들의 모임 ‘에타카파누’의 회장을 맡아 활동할 정도로 컴퓨터가 만들어낸 세상에 열중했다.

대학을 졸업한 래리 페이지는 스탠퍼드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곳에서 그는 두 번째 운명적 인물을 만난다. 바로 세르게이 브린이다. 두 사람은 이내 의기투합했다. 두 사람 모두 웹 페이지에 관한 공통의 관심사를 갖고 있었다. 래리 페이지는 웹을 백업하고 인덱싱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하지만 그 양은 그가 혼자 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그때 브린이 웹 페이지에 가치를 매기는 아이디어를 냈다. 래리 페이지는 이 아이디어에 빠져 들었다. 보통 논문을 쓸 때 다른 논문을 인용한다. 따라서 가치 있고 정확한 논문은 다른 논문에 많이 인용된다는 점에 착안했다. 웹 페이지 역시 가치 있는 것은 다른 웹 페이지와 많이 연결된다는 점을 파고들었다. 다른 웹 페이지와 얼마나 많이 링크되어 있는 지로 웹 페이지의 가치를 분석하려는 래리 페이지의 시도는 적중했다. 페이지는 이 프로젝트를 ‘백럽(BackRub)’이라고 불렀다. 래리 페이지는 검색 엔진의 이름으로 ‘백럽’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래리는 ‘이 세상의 모든 웹 페이지를 품겠다’는 원대한 포부로 엔진 이름을 ‘구골(googol)’이라고 지었다. 구골의 뜻은 10의 100제곱으로 무한함을 의미하는 것. 그런데 여기서 일화가 있다. 래리 페이지가 말한 구골을 세르게이 브린이 받아 적으면서 실수로 ‘구글(google)’로 적었는데 막상 구글이 구골보다 발음도 좋아 그대로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구골이라는 상표와 도메인은 이미 등록된 상태였다고. 이런 과정을 거쳐 1996년 8월, 구글이 세상에 나왔다. 재미있는 것은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공부한 곳이 바로 빌 게이츠가 스탠퍼드 대학에 기부한 돈으로 지은 윌리엄 게이츠 컴퓨터공학관이라는 것이다. 훗날 구글이 무섭게 성장해 MS의 영역에까지 도전하자 사람들은 “빌 게이츠가 호랑이를 키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구글은 큰 인기를 얻었다. 결국 스탠퍼드 대학의 서버가 구글 접속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폭주하자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구글을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정한 값은 100만 달러. 물론 큰 돈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거대한 공룡을 개미 한 마리와 맞바꾸겠다는 소박한(?) 시도였다. 래리 페이지는 100만 달러의 매수자를 찾기 위해 당시 야후 등과 접촉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야후 등은 포털을 지향하는 닷컴. 그들은 구글의 성능은 인정하지만 역설적으로 구글의 검색 기능이 너무 우수해 사용자가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적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매각에 실패한 래리 페이지는 결국 구글을 직접 운영하기로 결정하고 투자자를 찾아 나섰다. 래리 페이지는 엔젤 투자자 앤디 벡톨샤임에게서 10만 달러를 투자받는데 성공했고, 1998년 9월4일 세르게이 브린의 여자 친구 집 차고에서 창업했다. 래리 페이지의 나이 25세 때이다. 흥미로운 것은 구글 역시 휴렛 패커드, 애플, 아마존, 야후와 마찬가지로 ‘차고 창업 성공신화’의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구글은 그 뒤 성장한다. 하지만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의 비즈니스 경력은 일천했다. 그들은 천성적으로 엔지니어였고 개발자였다. 또한 구글의 성공을 담보로 투자한 투자자들은 20대 래리 페이지를 불안하게 보았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이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점차 구글 시스템 곳곳에서 적신호가 켜지기 시작했다. 즉 구글의 외형적 성공을 관리, 회계 등의 내부 경영 시스템이 받쳐주지 못했고 이로 인한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래리 페이지는 전문 경영인을 찾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구글을 맡을 경영인은 스티브 잡스밖에 없다”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사항이었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실리콘밸리의 IT전문 경영인을 만났다. 면접이었다. 애초 전문경영인 영입이 탐탁지 않았던 래리 페이지는 수십 명을 면접하면서 조금은 무례할 수 있는 압박면접을 실시했다. 면접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래리 페이지와 세브게이 브린도 지쳐갔다. 드디어 75번째 면접 대상자를 만났다. 바로 에릭 슈미트였다. 에릭 슈미트는 선마이크로시스템을 거쳐 소프트웨어 관련 IT 대기업 노벨(Novell)의 경영자를 역임한 노련한 인물이었다. 에릭 역시 자신처럼 IT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경영인이 조그만 회사, 더구나 20대 애송이 두 명에게 면접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에서 워낙 추천을 많이 해 ‘한 번 만나나 보자’고 나온 것이다.

에릭 슈미트, 그는 바로 래리 페이지 인생의 세번째 인물이다. 에릭은 면접을 하면서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게 반했다. 그들의 젊은 패기와 도전 정신, 그러면서도 확고한 비전을 정립하고 냉철하게 현실을 분석하는 안목에 놀란 것이다. 에릭은 래리 페이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2001년 래리 페이지는 구글의 최고 경영자 자리를 에릭 슈미트에게 인계하고 자신은 오로지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면서 내공을 기르는데 시간을 투자했다. 에릭은 ‘IT업계의 노련한 여우’라는 별명처럼 구글을 이끌었다. 약 10년 간 구글은 에릭 슈미트의 지도하에 성장했다. 래리 페이지 역시 에릭 슈미트로부터 최고 경영자로서의 능력과 임무 그리고 역할을 배웠다.

래리 페이지가 만난 세 명의 인물. 래리 페이지에게 영감과 비전을 준 니콜라 테슬라, 평생을 같이할 동지인 세르게이 브린, 그리고 진정한 리더십을 가르쳐 준 에릭 슈미트, 이 세 명이 바로 래리 페이지의 운명의 인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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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플렉스 사진 Jijithecat by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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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공개 그리고 두 번의 역사적 M&A

래리 페이지는 창업 1년 만에 총 3750만 달러를 투자받았다. 하지만 구글은 빠른 검색 능력에 비해 수익은 별로였다. 속도를 중시하는 래피 페이지는 속도에 조금이라도 걸림돌이 되는 배너 광고나 이미지, 동영상으로 웹 페이지를 도배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수익과 연결되는 장치였다. 래리 페이지는 고민했다. 구글의 창업정신을 지키면서 투자자의 이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러면서도 ‘Don’t be evil’을 잊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래리 페이지는 광고 노출로 돈을 받는 것이 아닌 클릭으로 돈을 받는 시스템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키워드 광고 노출인 것이다. 일테면 ‘캠핑’이란 단어를 입력하면 ‘캠핑과 관련된 각종 장비’를 노출하는 형태인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투자자, 광고주, 검색자 모두를 만족시켰다. 2001년 구글의 하루 검색량은 1억뷰를 돌파했다. 창업 이후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다. 더구나 이 해에 에릭 슈미트를 영입해 구글은 래리 페이지, 세르게이 브린, 에릭 슈미트라는 삼각경영체제를 완비했다. 구글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자체 신규 서비스도 속속 출시했다. 2004년 4월1일 지메일(gmail.com)을 시장에 내놓아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래리 페이지의 다음 목표는 기업 공개였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니콜라 테슬라에게서 완벽하고도 혁신적인 기술 개발과 그것의 상업화에 대한 교훈을 얻었다. 2004년 구글은 나스닥에 상장했다. 이 모든 작업을 래리 페이지가 지휘했다. 그는 평범한 기업 공개를 거부하고 ‘구글만의 독창성’을 주장했다. 래리 페이지는 온라인 경매로 주식을 팔았다. 그것도 월가가 가장 한가한 휴가시즌 8월을 선택했고 상장일은 공교롭게도 ‘13일의 금요일’을 선택했다. 업계에서는 ‘돈키호테 래리 페이지답다’고 평가했다. 래리 페이지의 ‘혁신 기업 구글은 미신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그러면서 래리 페이지는 “우리는 27억1828만1828달러 상당의 주식을 팔겠다”고 밝혔다. 무한을 의미하는 숫자에 대한 집착이었다.

구글의 상장은 대성공이었다. 주당 108달러를 받겠다는 래리 페이지의 고집 때문에 주당 85달러로 공모가를 낮추는 작업이 오히려 가장 큰 문제였을 정도. 사실 래리 페이지의 고집을 순화시키는 작업을 거쳐 구글은 ‘8월13일 금요일이 아닌 8월19일’ 상장했다. 구글은 첫날 주가는 100달러, 주가 총액은 무려 230억 달러에 달했다. 기업 공개로 현금을 비축한 구글은 기업 매수에 나섰다. 2005년, 래리 페이지는 안드로이드의 개발자인 앤디 루빈을 만났고 2005년 8월17일, 안드로이드(Android)를 인수했다. 래리 페이지가 안드로이드를 손에 넣은 비용은 불과 5000만 달러였다. 래리 페이지의 이 결정은 구글의 오늘을 만드는데 가장 지대한 공을 세운 선택이 되었다. 모바일 시대가 펼쳐지자 안드로이드는 그 위력을 여실히 발휘했다. 안드로이드는 모바일 운영체제 시장에서 86%(2017년 1분기), 전체 운영체제 시장에서 38%(2017년 1분기)를 점유하며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운영체제로 등극했다.

래리 페이지의 ‘기술 사냥’은 거침 없었다. 2006년 10월에는 16억5000만 달러를 지불하고 세계 최대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Youtube)를 인수했다. 당시 ‘구글이 너무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유튜브 인수는 안드로이드 인수와 함께 IT기업 인수의 가장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사례가 되었다. 이 두 기업의 인수를 통해 구글의 독주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래리 페이지는 멈추지 않았다. 과감한 인수 합병을 통해 구글의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어나갔다. 구글은 창업 이후 20년 동안 약 200여 개의 회사를 인수, 합병했다. 물론 이중에는 125억 달러를 주고 인수한 모토로라 같은 실패 케이스도 있다. 래리 페이지는 모토로라를 인수해 하드웨어에 도전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2014년 모토로라를 레노버에 28억 달러에 매각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물론 구글은 모토로라의 1만8000여 개의 특허를 손에 넣어 애플의 집요한 안드로이드 공격의 방어수단으로 훌륭하게 활용했지만, 래리 페이지의 인수합병 전략 중에서 크게 세 분야, 즉 하드웨어, 소셜네트워크, 커머스 분야는 실패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에릭 슈미트가 전면에 등장해 구글을 이끈 10년 동안에 래리 페이지의 막후 영향 또한 지대했다. 에릭 슈미트를 도와 구글의 기업 공개를 성공적으로 완수했고 무엇보다 앤디 루빈과 만나 그의 아이디어인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5000만 달러에 인수한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리더의 결정이었다. 현재 세상을 지배하는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페이지의 선택이 구글은 물론이고 우리 삶에도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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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벳 설립, 구글의 미래를 정하다

2011년, 래리 페이지는 구글 최고경영자로 복귀했다. 래리 페이지가 구글의 모든 경영을 총괄하고, 세르게이 브린이 차세대 기술 연구를 담당하고, 에릭 슈미트는 회장으로서 두 사람에게 경영 조언을 하는 체제가 되었다. 경영의 최전선으로 돌아온 래리 페이지는 미래 전략에 몰두했다. 그는 인공지능에 집중했다. 이세돌과 세기의 바둑대결을 펼친 알파고의 산실인 데미스 하사비스가 설립한 딥마인드, 인공 지능 핵심 기술을 갖고 있는 DNN리서치를 인수하고 ‘구글=인공지능 기술 선두’라는 등식을 업계에 전파했다. 래리 페이지는 인수합병이야 말로 기업 체질 개선과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그것의 밑바탕에는 구글이 단순한 검색, 인터넷 회사가 아니라는 그의 신념이 깔려 있다.

회의에서 한 직원이 “구글을 구글닷컴이라고 부르면 왜 안 되는가?”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래리 페이지는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 우리는 단순한 닷컴기업이 아니다. 우리 구글은 인터넷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와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루는 기업이 될 것이다”라고 답하며 구글의 미래 지향점을 정확히 밝혔다. 2015년 8월, 래리 페이지는 구글을 지주회사 체제로 재편했다. 지주회사 알파벳을 설립하고 구글의 사업부서를 독립 회사로 분사해 사업의 효율성을 강화했다. 그리고 래리 페이지는 구글 지주사인 알파벳의 CEO로 취임했다. 이제 구글은 검색, 모바일, 인공지능, 바이오, 사물인터넷, 자율주행차, 이동통신, 벤처 투자는 물론이고 미래 사업을 담당하는 각 자회사로 분리되었다. 이것은 각 사업부서별 그야말로 자율주행을 통한 기술 혁신과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한 구글과 래리 페이지의 전략인 것이다. 래리 페이지는 알파벳의 CEO로 취임하며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밝혔다.

“창업 이후 우리가 한 일들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아마도 미친 일이라 할 것이다. 그 미친 일들의 결과가 지금의 구글이다. 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계속 다른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는 일들을 시도해 볼 것이다. 기업은 안주하려 한다. 혁신의 기술 산업에서 안주를 불편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구글은 전통적 의미의 회사가 아니다. 우리는 그 이상을 만들고자 한다. 이번에 회사 이름을 알파벳으로 지은 것은 바로 알파벳이 인류 최고의 혁신이라 할수 있는 언어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래리 페이지의 도전은 계속되었다. 그는 2016년 10월, 이른바 ‘메이드 바이 구글made by Google’을 선언했다. 이는 하드웨어 분야에서도 구글 제국을 완성하겠다는 야심이었다. 즉, 구글이 하드웨어를 만들고 여기에 각종 소프트웨어와 서비스를 담겠다는 것이다. 바로 구글폰인 스마트폰 픽셀, VR기 데이드림 뷰, TV 스트리밍기기 크롬캐스트 울트라, 가정용 스마트 비서 겸 스피커인 구글 홈 등이다. 이 결정은 래리 페이지의 결단에 의해서 내려졌다. 그는 “앞으로 모바일 퍼스트시대는 가고 향후 10년은 AI퍼스트시대가 될 것이다”고 공언했다. 구글 특히 래리 페이지가 미래 산업에 있어 인공지능AI에 전력을 쏟아 부을 것임을 암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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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카 사진 Mark Doliner by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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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더십 | 혁신의 비결, 그것은 소통이다

래리 페이지를 만나 본 사람들은 그의 비사교적이고 과묵한 성격을 들어 혹시 자폐증이 아닌가라고 묻기도 한다. 그런 그가 수다쟁이가 될 때도 있다. 그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놓을 때이다. 그가 묻는 질문의 첫 시작은 항상 “왜 그렇게 해야 하는데?”이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되묻는 과정에서 래리 페이지의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샘솟는 것이다.

“대학에서 세미나에 참여했을 때의 슬로건이 ‘불가능에 대한 건전한 무시’였다. 이후 늘 나와 함께 한 생각이 되었다. 덜 위험한 계획보다 어마어마하게 야심 찬 목표를 발전시켜 나가기가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통 사람들이 야망이나 계획에서 실패했다고 말할 때,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정말 완벽하게 실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점을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구글 사람들조차 래리 페이지와 브린을 비교하면서 “비전을 실현시키는 자는 래리 페이지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래리 페이지의 도전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구글에는 독특한 소통 시스템이 있다. 바로 ‘TGIF(Thank’s God It’s Friday)’이다. 매주 금요일 점심에 모든 직원이 모여 자신의 생각을 전 직원에게 알릴 수 있는 시스템이다. 아이디어는 물론이고 회사에 대한 불만 등 무엇을 말해도 된다. 물론 래리 페이지도 참석한다. 회의를 통해 직원들의 불만과 불편을 해소할 수 있고 혁신 아이디어를 발굴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래리 페이지의 제안이었다. TGIF는 지금 목요일 점심에 진행한다. 이유? 금요일에 TGIF를 진행하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구글 직원들이 회의에 참석할 수 없다는 구글다운 발상에서다.

래리 페이지의 또 하나의 특징은 꼼꼼함이다. 이는 ‘칫솔 테스트(Toothbrush Test Framework)’에서 볼 수 있다. ‘우리가 인수, 합병할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기술이 칫솔처럼 우리에게 자주 이용되는지, 혹은 없으면 매우 불편한지를 파악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같은 래리 페이지의 경영 전략과 리더십을 보면 그가 노출을 꺼리는 전형적인 은둔형 최고경영자라고 한마디로 단정하기 어렵다. 그는 대중과 언론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을 뿐 구글의 모든 직원, 엔지니어들과 항상 소통하는 리더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이런 일화도 있다. 한번은 구글의 소비자서비스 담당 직원이 래리 페이지에게 직원 충원을 요청했다. 래리 페이지는 담당자를 불러 오히려 새로운 제안을 했다. “1대 1로 사용자에게 일일이 답해주는 방식으로는 계속 직원을 충원해도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나는 사용자들이 서로 답변을 해주도록 시스템을 만들고 우리는 그것을 도우면 된다고 생각한다.” 현실성 없는 제안이라고 일선 담당자들은 반발했지만 구글은 래리 페이지의 제안을 ‘Google Forums’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이 시스템은 성공했다. 래리 페이지의 위치가 최고 경영자이고, 혹은 미래만 바라보는 리더이기에 오히려 현실성에서는 부족할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키는 일화이다.

래리 페이지는 아직 젊다. 건강에 대한 염려가 있으나 그의 혁신은 이제 시작인 셈이다. 구글 직원들의 복지후생을 위해 완벽한 시설을 갖추었다는 칭찬도, 20대 창업의 성공에 대한 신화도 사실은 래리 페이지에게 별 의미 없는 것일지 모른다. 그는 미래의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꿀까를 고민하는 ‘미래설계자’인 것이다. 어느 날 래리 페이지는 비서실을 없앴다. 그날부터 구글의 직원들은 페이지에게 보고를 하려면 그를 쫓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심지어 구글 내에서는 페이지의 이동 정보를 서로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지를 쫓아다니기는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다. 페이지가 워낙 빠르게 돌아다니면서 직원들과 소통하기 때문이다. 그는 ‘혁신은 최고의 소통으로 가능하다’고 믿었던 전략가였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위키미디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593호 (17.08.2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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