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17 (일)

[고려인 강제이주 80년] ⑥ 신한촌의 어제와 오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새로운 한인촌' 의미…우국지사 활동한 독립운동의 요람

고려인 제2의 고향…1937년까지 번성하다 흔적 사라져

연합뉴스

블라디보스토그 신한촌 흔적 없어질 위기
(블라디보스토크=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자리에 있는 서울거리 표지판. 24일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회상열차 탐사단이 이곳을 찾았을 때 건물 재건축 공사를 벌이고 있어 표지판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heeyong@yna.co.kr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러시아 공식 문서에 따르면 1864년 한민족이 연해주(沿海州·프리모르스키)의 지신허(地新墟·치진헤) 마을로 이주해 살았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착취와 기근을 피해 두만강을 넘는 조선인은 해가 갈수록 불어났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러시아의 동방정책에 따라 블라디보스토크가 건설되자 이곳에 자리 잡았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어로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이며,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해삼이 많이 난다고 해삼위(海蔘威)라고 불렀다.

1886년 400명, 1891년 840명 등으로 한인의 숫자가 불어나자 시 당국은 1893년 도심 인근에 집단거주 구역을 설정했다. 러시아인은 이곳을 고려인촌이라는 뜻의 '카레이스카야슬라보드카'라고 불렀고 한인들은 개척리(開拓里)로 명명했다.

1911년 5월 시 당국은 콜레라 창궐을 핑계로 이곳을 강제 철거해 기병대 숙소로 삼고 한인들을 북쪽으로 2㎞ 떨어진 언덕으로 이주시켰다. 이곳이 새로운 한인촌이라는 뜻의 신한촌(新韓村)이다. 가옥은 대개 12평(약 40㎡) 남짓한 목조였으며 양철지붕에 유리창을 내고 온돌을 깔았다.

그해 8월까지 1천500명 정도가 옮겨 살았고 1915년에는 주민이 1만 명에 이르렀다. 특히 빼앗긴 국권을 되찾으려는 우국지사들이 속속 집결해 항일독립운동의 요람이 됐다.

간도관리사를 지내다 의병을 조직한 이범윤, 헤이그 특사를 지낸 이상설, 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등이 신한촌에 자리 잡았고 이동휘, 이동녕, 안창호, 박은식, 신채호 등도 가세했다.

신한촌 건설과 함께 탄생한 조직이 권업회(勸業會)다. 겉으로는 고려인들의 농업과 상공업을 권장하는 실업단체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권업신문을 발간하며 애국계몽운동과 항일구국운동에 힘을 쏟았다. 초대 회장은 최재형이었다.

연합뉴스

신한촌 기념공원 조성 계획 설명하는 이창주 집행위원장
(블라디보스토크=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이자 신한촌역사회복재건위원회 집행위원장인 이창주 상트페테르부르크 석좌교수가 24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기념비 주변에 조성할 공원 조감도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heeyong@yna.co.kr



신한촌 한인들은 1914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도 조직했다. 이상설과 이동휘가 각각 정·부통령 격의 정도령(正道領)과 부도령(副道領)을 맡아 독립전쟁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해 1차대전이 터지자 대일 관계 악화를 우려한 러시아 당국이 권업회와 광복군정부를 강제로 해산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독립군 상당수는 러시아혁명군(적군·赤軍)에 가담, 반혁명연합군 백군(白軍)의 일원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한 일본군과 싸웠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군 세력이 속속 연해주에 집결하자 1920년 4월 일본군은 신한촌을 급습해 한인 300여 명을 학살하고 방화와 파괴를 저질렀다. 이른바 '4월 참변(신한촌 참변)'이다.

이어 1921년 6월 인근에서 일어난 '자유(스보보드니)시 참변', 소비에트연방(소련) 수립 후 독립군에 대한 당국의 탄압 등으로 신한촌의 항일운동 열기는 급격히 약화됐다.

그래도 신한촌으로 몰려드는 한인은 더욱 불어나 주변의 황무지들을 개간해 옥토로 바꿔나갔다. 신한촌에는 한글신문 '선봉(先鋒·고려일보 전신)' 등이 발간됐고 고려극장도 창단됐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정권이 이 일대의 고려인을 모두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켜 신한촌은 뿌리째 뽑히고 말았다.

그로부터 80년 뒤인 24일 오후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극동실크로드 오디세이-회상열차'에 참여한 각계 인사 84명이 이곳을 찾았다.

이 일대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옛 자취는 찾아볼 수 없고 1999년 3·1운동 80주년을 맞아 해외한민족연구소가 국민 후원금을 모아 그해 8월 15일 세운 기념비만이 당시 역사의 편린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높이 3.5m가량의 대리석 기둥 세 개는 각각 남한, 북한, 재외동포를 상징한다. 주변에는 조선 팔도를 의미하는 작은 돌 8개를 놓았다. 이창주 집행위원장(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 석좌교수)은 당시 러시아 당국이 한국이나 한민족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글귀나 상징물을 새기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연합뉴스

'독립운동의 요람' 신한촌 기리는 기념탑
(블라디보스토크=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아 고려인들의 행로를 따라가는 탐사단이 24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기념탑을 찾았다. 세 기둥 가운데 가운데는 남한, 왼쪽은 북한, 오른쪽은 재외동포를 상징한다고 한다. heeyong@yna.co.kr



그 앞에 검은 돌로 세운 비석 앞면에는 "민족 최고의 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다.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족정신이며 청사에 빛난다. 신한촌은 그 성전의 요람으로 선열들의 얼과 넋이 깃들고 한민족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곳이다…"라고 신한촌을 소개해놓았다.

뒷면의 건립기에는 신한촌 기녑탑을 세운 동기와 힘을 보탠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고려인 가운데는 정유리 러시아고려연방회장과 이 웨체스라브 블라디보스토크 고려인회장, 건립비를 후원한 한국경제인연합회과 백미산업 이인기 사장, 이사장 손세일과 소장 이윤기 등 해외한민족연구소 명단 등의 이름이 눈에 띈다.

기념탑이 자주 훼손되자 탑 주변을 철제 울타리로 둘러치고 자물쇠까지 채워 쉽게 출입하기도 어렵다. 이 웨체스라브 회장이 열쇠를 관리하고 있으나 미리 연락하지 않으면 먼발치에서 넘겨다보고 가야 한다.

현지인들에게 이곳이 한인들의 집단거주지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단서는 주소 표지판이 유일했다. '세울 스카야 2A', 즉 서울 거리 2A번지라는 뜻이다. 이 표지판은 현재 러시아인이 사는 집 외벽에 붙어 있는데 현재 재건축 중이어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선생의 집터에는 상가건물이 들어서 '엘레나'라는 상점 간판이 붙어 있다. 한인학교와 한인교회는 물론 3·1운동을 기념해 소나무로 장식한 독립문도 사라진 지 오래다.

첫 한인촌인 개척리의 사정은 이보다 더 안타깝다. 대동공보, 해조신문 등의 신문이 발간되던 자리는 블라디보스토크 최고의 번화가로 탈바꿈해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고 지번도 여러 차례 바꿔 위치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2014년 한인의 러시아 최초 이주 150주년을 기념해 한국과 러시아의 우호를 기원하는 비석을 개척리 중심가에 세웠으나 개척리에 대한 설명도 없고 그나마 키릴문자(러시아어 알파벳)로만 적혀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heeyong@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