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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단독]단 하나의 증거 ‘잉어문신’ 찾아 1만km… 낚았다, 그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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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전 성폭행범 검거한 서울 도봉署 형사들

동아일보

지난해 12월 서울 도봉경찰서를 찾은 김모 씨(23·여)의 양 손목에는 칼로 그은 자국이 여러 군데 있었다. 여고 2학년이던 6년 전 또래 남성 6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뒤 자살을 시도한 흔적이었다. 김 씨를 앞에 앉혀 두고 여성청소년과 수사4팀 형사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돕고 싶었지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미 6년이 지나 사건 현장은 남아 있지 않았다. 가해자들도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게다가 김 씨는 당시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다.

김 씨는 경찰서 두 곳에서 ‘퇴짜’를 맞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봉서 문을 두드린 상황이었다. 형사들은 서울 초안산 여중생 집단성폭행 사건 범인 22명을 지난해 검거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2011년 벌어졌던 그 사건도 ‘맨땅에 헤딩’은 마찬가지였다.

○ 깨어난 곳은 비 내리는 뒷골목

조사를 시작한 지 며칠 뒤인 지난해 12월 말 김 씨의 친구가 수사팀에 다급히 연락을 했다. 김 씨가 수면제를 먹고 또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형사들은 김 씨를 병원 응급실로 옮겨 위세척을 받게 했다. 가까스로 회복한 뒤 조사실에 다시 앉은 김 씨는 여전히 형사들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그날’ 이후 6년이 지나도록 김 씨는 불안감을 이겨내지 못했다.

“아는 오빠들과 함께 놀자”는 같은 반 친구를 따라나선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2011년 8월 김 씨(당시 17세)는 친구를 따라 전남 장흥의 한 모텔에 갔다. 술을 몇 잔 받아 마신 뒤 정신을 잃은 김 씨가 다시 정신을 차린 곳은 모텔 방 화장실이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발로 배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더럽게 생리를 한다”며 욕설이 들려왔다. 극심한 고통으로 정신이 희미해질 때쯤 성폭행이 시작됐다. 화장실 문 밖에서 “내가 먼저”라며 순번을 정하는 웅성거림이 의식을 잃기 전 들은 마지막 소리였다. 김 씨가 깨어난 곳은 어느 중학교의 뒷골목. 내리는 비에 흠뻑 젖은 채 홀로 버려져 있었다.

참혹했던 당시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은 김 씨에게도 형사들에게도 고통이었다. 힘겹게 찾아낸 첫 번째 단서는 김 씨가 겨우 끄집어낸 한 조각 기억이었다.

“(가해자) 팔 알통 부분에 문신이 있었어요. 잉어 문신.”

○ ‘잉어 문신’은 펄떡 뛰는데…

문신. 지워지지 않는 그 표시는 결정적 물증이 될 수 있었다. 여전히 막막했지만 그나마 수사팀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형사들은 2011년 당시 김 씨에게 모텔에 가자고 했던 친구 A 씨(23·여)부터 수소문했다. A 씨는 자신이 모텔행을 제안한 것은 맞지만 바로 나와서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른다고 부인했다. 다만 A 씨는 “모텔에는 동네 오빠 2명과 고교 동창 남자 애가 있었다”고 말했다.

수사팀은 바로 김 씨와 A 씨의 고교 동창인 이 남성을 불렀다. 혐의를 내내 부인하던 이 남성 동창은 “나중에 술이 깨서 화장실에 가봤다. 옷이 벗겨진 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기에 수습해서 골목길에 내려놓았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당시 모텔에 다른 남성 3명이 더 왔다”고도 했다. 김 씨의 신고를 긴가민가하던 수사팀이 성폭행이 벌어진 게 맞다고 확신한 순간이었다.

수사팀은 이들 남성을 도봉서로 불렀다. 장흥과 그 주위에 대부분 살던 남성들은 1명을 제외하고는 올라와 조사를 받았다. 수사팀은 조사하기 전에 이들의 옷소매를 어깨까지 걷어 올려 보라고 했다. 있었다. 송모 씨의 팔뚝 양쪽에 잉어가 펄떡펄떡 뛰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 사건에 대해선 하나같이 “모른다”며 “김 씨가 미친 거 아니냐”고 몰아갔다. 서로 입을 맞춘 흔적이 역력했다. 이를 반박할 증거는 없었다. 수사팀의 고민이 다시 시작됐다.

○ “그놈이 했어요” 결정적 진술

동아일보

수사팀은 전국에 퍼져 있는 관련자들을 찾아다녔다. 팀원 4명이 함께 피해자와 피의자 친구들을 찾아 장흥, 광주, 담양, 부산 등 전국을 1만 km 이상 다녔다. 그러던 중 소환에 응하지 않았던 위모 씨가 사는 부산에서 그의 친구로부터 결정적인 단서를 들었다. “송 씨(당시 19세)가 화장실에서 여고생을 성폭행했다고 하는 얘기를 친구 위 씨가 하더라.” 잉어가 팔뚝에서 뛰던 그 송 씨였다.

경찰은 이 진술을 근거로 위 씨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붙잡았다. 위 씨는 얼마 전 결혼해 아이가 갓 태어난 상태였다. 형사들은 서울로 올라오는 승용차 안에서 “떳떳한 아빠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3시간 넘게 침묵하던 위 씨는 서울에 진입하자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놈이 했어요. 송○○.”

경찰은 11일 송 씨를 특수강간 혐의로 구속했다. 나머지 가해 남성 5명과 친구 A 씨도 18일 같은 혐의로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

6년 전 자신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가해자들이 검거된 뒤에야 김 씨는 마음의 안정을 찾는 듯했다. 그는 당시 사건 이후 고향에서 오히려 ‘헤픈 여자’란 소문이 돌자 도망치듯 서울의 대학으로 유학 왔다. 학사경고까지 받는 등 방황을 멈추지 못했던 그는 이제야 “경찰관이 되고 싶다”며 앞날을 생각하게 됐다.

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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