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7.09 (화)

스누피 우유와 최저임금 1만원의 함수관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퇴근길에는 꼭 편의점에 들른다. 사는 물건은 정해져 있다. 만화 캐릭터 ‘스누피’가 그려져 있는 커피우유다. 다음날 아침 일찍 출근할 때 마시려 산 것이다. IT업계에서 일하는 최윤성씨(26)는 오전 8시까지 출근해야 한다. 전날이 아니라 바로 그날 오전 1시 반에 집에 들어왔는데 말 그대로 눈 깜박할 사이에 출근시간이 와버렸다. 버스와 전철에 몸을 싣고 1시간을 가서 ‘가디단(가산디지털단지)’ 역에 도착한다. 오전 6시에 휴대전화 알람을 맞춰 두지만 눈꺼풀과의 악전고투 끝에 화장실에 들어서는 시간은 6시 20분. 고양이 세수를 하고 나와 ‘스누피 커피우유’의 주둥이를 쥐어뜯으며 집을 나선다. 한 팩에 237㎎ 들어 있는 카페인의 효과는 놀랍다.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시간 동안 점차 정신이 들기 시작한다.

타이밍 알약을 스누피 우유로 대신

초보 직장인인 최씨가 편의점의 스누피 우유 단골이 된 때는 지금의 직장에 들어가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해 정월 초하루를 최씨는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하며 맞이했다. 최씨의 기억으론 일하던 편의점에 스누피 우유가 들어오기 시작하던 때가 그 무렵이었다. 처음엔 행사상품이라서, 가격 대비 양이 많아서 먹었는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8시간짜리 야간 알바를 끝내고 다음날 아침에 돌아가도 생생한 정도를 넘어 잠이 들지 않았다. 다음날 출근해 카페인 함량을 확인하고서야 이유를 알아챘다. 보통의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에 든 카페인이 평균 125㎎, 캔커피 한 캔에는 60~80㎎ 정도의 카페인이 들어 있다. 캔커피 서너 캔을 단숨에 들이킨 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스누피 우유는 입소문을 타고 인기품목이 됐다. 처음에는 밤샘 시험공부를 하는 대학생들이 자주 찾더니, 차차 중·고등학생도, 직장인도 너나 없이 스누피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씨 역시 편의점 알바를 마치고 취업에 성공한 뒤에도 스누피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최씨가 다시 집에 들어오려면 긴긴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야 한다. 늦으면 날짜가 바뀌는 때도 잦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편의점에 새 물건이 납품돼 진열되는 시간대와 겹친다. 이미 얼굴이 익은 동네 단골 편의점 알바는 최씨가 오면 스누피 우유가 들어와 있는지 여부를 알려준다. “어쩌다 퇴근 빨리하는 날도 있으니 그런 날은 저녁시간에 편의점에 들르죠. 분명 기분 좋아야 할 일인데, 그 알바도 없고 스누피도 다 팔리고 없으니까 대신 캔커피 사서 들어오는 날은 뭔가 섭섭하기도 해요.” 이미 낮 동안에도 인스턴트 커피를 몇 봉 뜯어 카페인에 내성이 생겨버린 최씨의 몸은 스누피 우유가 아니면 아침잠을 쫓기도 어려워지게 돼버렸다.

재봉틀 바늘에 손이 찍히지 않으려 ‘타이밍’이란 각성제 알약을 삼키며 밤을 지새운 미싱사들의 뒤를 이어 30~40년이 지나 불야성을 이룬 가산동 일대 IT 업무단지에서도 장시간 노동이 되풀이되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한국 사회의 장시간 노동은 새롭지 않은 얘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6년 고용동향’을 보면 한국의 취업자 1인당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2113시간으로 OECD 34개국 평균 1766시간보다 347시간이 많다. 멕시코(2246시간)에 이어 장시간 노동 OECD 2위라는 불명예를 수년째 받고 있다. 초과근로 347시간을 법정 노동시간(8시간)으로 계산하면 OECD 평균보다 43일, 미국보다 40일, 일본보다 49일, 영국보다 55일 더 일하는 셈이다.

타이밍 알약을 카페인 범벅 스누피 우유로 대신해가며 쌓아올린 한국 경제의 위상이 장시간 노동에 기대고 있다면, 노동량에 걸맞은 대우도 OECD 최고 수준일까. OECD에 따르면 한국의 취업자 1인당 연간 평균임금은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3만3110 달러, 등수로는 22위에 그쳤다. OECD 평균 4만1253 달러의 80.3% 수준이다. 문제는 시간당 임금이다. 15.67달러로 OECD 평균(23.36달러)의 67.1%에 불과하다. 노동시간이 길다보니 시간당 임금은 더욱 낮아지는 셈이다. 15.67달러는 현재 환율로 약 1만8087원, 그리고 2017년 현재 최저임금은 그 3분의 1 정도인 6470원이다. 최저임금 수준도 하위권에 머무르는 점은 비슷하다. 구매력 평가 기준(PPP) 환율로 환산한 한국의 실질 최저임금은 지난해 기준 시간당 5.8달러였다. 최저임금제를 시행하고 있는 27개 회원국과 비회원국 5개국을 더한 32개국 중 21위다.

경제학자 피케티의 불평등 척도 적용

결국 장시간 노동이 최저임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장시간 노동은 전체 노동시장에서 단위시간당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낮은 시간당 임금수준은 시급의 하한선으로 통용되는 기준인 최저임금을 더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를 덮어버리는 근거가 된다. 그리하여 결정된 낮은 최저임금 수준에 맞춰 생활을 꾸려가야 하는 시간제 노동자를 비롯한 다수의 비정규직·불안정 노동자들은 조금이라도 더 일을 해야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 낮은 최저임금이 장시간 노동을 유도하고, 장시간 노동은 최저임금을 높일 여력을 갉아먹는 셈이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측이 노동비용을 줄이려 신규채용보다는 손쉬운 초과노동과 외주화를 택하면서 장시간 노동을 유도하는 동안 노동자의 건강이 나빠지고 산업재해가 발생하는 등 생산성 저하를 부른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추가 인력을 고용해 일자리를 늘리는 데도 장애물이 된다. 고영국 민주연구원 연구위원은 “장시간 노동의 근본적 원인은 짧은 노동생애와 파트타임 노동의 낮은 임금수준, 그리고 미비한 고용안정성 등과 관련이 있다”면서 “만연한 저임금과 비정규직화 속에서 자녀양육비 및 주거비, 노후자금이 충분하지 않은 현실과 맞물려 소득을 높이기 위한 장시간 노동으로 연결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작 이렇게 오랜 시간 일해서 돈을 벌어도 노동소득이 증가하는 속도는 부동산 등 자본소득이 증가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따라잡기는커녕 뒤처지는 속도가 높아져 차이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21세기 자본>이란 연구서를 통해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불평등의 정도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밝힌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논의를 빌리면 한국 사회의 소득불평등의 수준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피케티가 연구에서 적용한 불평등 척도 중 하나인 자본/소득 배율을 놓고 봤을 때 현재의 한국은 세계사에서 손꼽을 만큼 불평등이 심화된 사회라는 분석이 나왔다. 한국의 자본/소득 배율은 지난해 기준 8.28배에 달했다. 역사적으로 18~19세기 유럽에서 최고치를 기록했던 시기에 나온 6~7배 수준보다도, 일본의 버블 경제가 정점을 찍었던 1990년에 기록한 6.99배보다도 높은 것이다.

자본/소득 배율이란 한 나라 안의 모든 부를 한 해 동안 그 나라 국민들이 벌어들인 소득으로 나눈 값이다. 쉽게 표현하면 통상 이 비율이 높을수록 자본에 비해 노동이 가져가는 몫이 줄어드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비율이 높다는 것은 한 사회에서 평균적인 소득을 올리는 사람이 평균적인 부를 쌓는 데 걸리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뜻이기 때문에 소득불평등의 척도로 활용되는 것이다. 지난해 해외 각국의 자본/소득 배율을 보면 미국 4.1배, 일본 6.01배, 영국 5.22배 수준이었다. 피케티의 분석에서는 이 비율이 1970년대에 선진 8개국의 2.5~4배 수준까지 낮아졌지만 2010년 들어 많게는 6.5배까지 올랐다는 점을 들어 소득불평등마저도 세계화되고 있다는 근거로 제시됐다. 한국은 이 세계적인 불평등 추세에 동참하고 있으면서 그 정도는 더 극심하게 나타나는 셈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소득불평등이 처음부터 이렇게 높게 나타난 것만은 아니었다. 국내의 이력만 따져보면 1996년 5.98배였던 비율이 20년간 8.28배로 급격하게 오른 것이 확인된다. 특히 최근 5년간의 비율 변동 추이를 보면 2012년 8.02였던 비율이 해마다 증가세를 보이며 8.28배까지 올랐다. 같은 기간 박근혜 정부에서 주택시가총액과 주거용건물토지총액 모두 각각 22.2%, 24.5% 상승하며 자본소득이 늘어나도록 이끌었지만 노동소득은 그에 미치지 못했던 점이 주된 이유로 분석됐다. 분석을 진행한 더불어민주당 제윤경 의원은 “한국의 자본/소득 배율이 다른 선진국보다 매우 높은 수준인 것은 대부분 토지 등 부동산 가격이 지나치게 높은 것과 관련이 깊다”며 “자본소득은 노동소득에 비해 더 불평등하게 분포되어 있으므로, 이 비율이 높으면 개인별 소득과 부의 분배도 모두 악화된다”고 설명했다.

경향신문

6월 27일 서울 광화문에서 청년단체 회원들이 최저임금 1만원 인상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부동산 가격만 높아지는 소득불평등의 악화는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자영업자의 생계까지 위협한다. 부동산 가격이 높아지면서 임대료가 오르면 즉각 타격을 입는 것은 자신의 건물을 갖지 못하고 세들어 영업하는 자영업자들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영세 자영업자들은 오히려 고용하고 있는 노동력이 없어 최저임금 인상의 영향은 미미한 대신 부동산 가격과 임대료 변동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전국유통상인연합회 인태연 회장은 “중소 자영업자들이 엄청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최저임금 올리는 것이 힘들다는 논리도 틀리진 않지만, 그럼 월급을 안 올리면 중소 자영업자들이 먹고살 만한가 하면 그게 아니다”라며 “영세 자영업자들이 힘든 원인은 대기업들과 프랜차이즈 업체 등의 수탈체계로 인해 적정 수준의 마진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 본질이라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저임금 높이고 노동시간 줄여야

영세 자영업자 입장에선 고정비용이 내려가지 않으면 줄일 수 있는 부분은 인건비가 거의 유일하다. 원래 있던 직원을 줄여 혼자 일하거나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가족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직원을 한 명도 고용하지 않는 고용주 단독사업자는 2015년 기준 전국 480만명에 달하는 자영업자 가운데 392만명으로 82.0%에 달했다.

장시간 노동과 낮은 최저임금이 거대한 소득불평등 구조를 굴러가게 만드는 핵심 고리이기 때문에 두 문제를 함께 해결한다는 정책방향은 문재인 정부 출범 전 대선공약에서 제시되기도 했다. 노동시간을 단축해 일자리를 나누고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1만원까지 인상하는 안은 대표적인 노동공약이면서 정부 출범 후에도 추진 중인 정책이다. 현행 법정 최장노동시간인 주 52시간을 지켜 임기 내 1800시간대의 노동시간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최저임금을 1만원까지 인상하는 정책도 임금수준 격차 해소를 위해 보다 시급하게 시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해외에서 훨씬 저렴한 임금으로 제품을 만들고 있는데 언제까지 낮은 최저임금에 기초해 경쟁할 수는 없다”며 “저가격이 아니면 경쟁할 수 없는 한계산업은 구조조정이 시급한 상황이므로 최저임금도 못 주겠다는 기업 주장을 따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다만 노동시간 단축과 최저임금 인상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더라도 고용주체인 기업의 참여를 이끌어내려면 정부가 당근을 제시하는 방안도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새롭게 도입한 제도가 자리잡을 때까지 어느 정도 정부의 보조가 뒤따르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린다면 해마다 평균 인상률이 15% 안팎에 이를 것이기 때문에 부담을 최소화하는 대책도 필요하다. 이용섭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은 소상공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이 시행되면 소상공인의 어려움이 가중될 수 있지만 소상공인 지원대책 역시 대통령 공약에 포함돼 있는 만큼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카카오 친구맺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