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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9 (화)

의사에 뒷돈 건네 장해등급 올려… 산재보상심사 ‘비리 요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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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브로커·의사·근로복지공단 직원 등 39명 적발

세계일보

장해등급이 높으면 산재보상금 지급액이 그만큼 증가하는 점을 악용해 장해등급 결정을 사실상 좌우하는 산재지정병원 원무과장, 근로복지공단 직원·자문의 등에게 불법적인 금품로비를 한 브로커 일당이 검찰에 적발됐다. 이들 브로커는 산재지정병원 원무과장들로부터 환자를 소개받고 소개비, 진단서 발급비 명목으로 금품을 제공한 뒤 높은 장해등급의 진단서를 발급받아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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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 장해등급 결정, 브로커가 좌지우지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부장검사 이용일)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산재보상 심사 비리를 대대적으로 수사한 결과 브로커, 근로복지공단 직원·자문의, 산재지정병원 원무과장·의사, 공인노무사·변호사 등 총 39명을 적발해 재판에 넘겼다고 28일 밝혔다. 검찰이 이날 발표한 수사결과를 보면 죄질이 나쁜 16명은 구속기소하고 23명은 불구속기소했다.

형사처벌을 받은 39명 가장 많은 16명은 이른바 산재브로커다. 이들은 산재지정병원 원무과장을 통해 소개받은 환자들에게 “높은 장해등급을 받게 해주겠다”며 사건을 위임받아 환자들이 지급받은 산재보상금의 20∼30% 상당을 수수료로 취득한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 수사 결과 브로커들은 원무과장 등을 통해 높은 장해등급의 진단서를 발급받아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한 뒤 공단 직원·자문의사에게 “진단서 내용대로 장해등급을 결정해달라”고 로비한 것으로 밝혀졌다.

브로커들은 공단 직원을 통해 자문심사 결과를 미리 알아내 환자에게 알려줬는데 이를 통해 환자들은 더욱 브로커를 믿게 되었다고 검찰은 전했다. 검찰 관계자는 “일부 산재브로커는 공인노무사 명의로 노무법인을 설립하거나 변호사로부터 법무법인 명의를 대여받아 직원 10여명을 고용하고 24억∼26억원의 수수료 수익을 올리는 등 기업형으로 성장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장해등급 결정을 좌우하는 근로복지공단 일부 직원의 극심한 도덕적 해이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산재브로커로부터 사건 접수·처리, 결과·지급일 사전 통지, 자문일자 조정, 자문의사에 대한 청탁 등 부탁을 받고 그 대가로 뒷돈을 받아 챙긴 것이다.

공단 차장 S씨는 브로커로부터 베라크루즈 차량 대금 3750만 원을 차명계좌로 받은 것을 비롯해 브로커 3명으로부터 총 1억2900만원가량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들통나 구속됐다. 또다른 차장 T씨는 브로커 2명에게 총 2510만원가량의 뇌물을 받았는데 조사 결과 브로커, 산재지정병원 원무과장들과 테니스 동호회를 만들고 테니스코치로 활동하던 이에게 “산재브로커로 뛰어볼 생각 없냐”고 권유해 브로커로 활동하게 한 뒤 산재처리내역 등을 알려주고 수시로 금품과 향응을 요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역시 공단 차장인 U씨는 브로커에게 청탁받은 내용을 자문의들에게 다시 청탁하면서 금품을 주는가 하면 브로커와 자문의들을 서로 소개시켜 주고 매월 정기적 모임을 열어 금품을 수수하는 등 비리의 연결 구조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그는 브로커 2명에게 총 5500만원가량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적발돼 철창 안에 갇힌 신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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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병원 의사조차 뒷돈 받고 심사 조작

장해등급 조작 비리 뒤에는 이를 묵인하거나 적극 가담한 의사들이 있다. 근로복지공단은 대학병원급 정형외과 의사들을 자문의로 위촉해 산재지정병원 주치의가 작성한 진단서 장해등급의 적절성을 심사하고 있는데, 이처럼 막강한 권한을 지닌 자문의가 브로커로부터 “장해등급 심사를 잘 부탁한다”는 부정한 청탁을 받고 그 대가로 건당 50만∼100만원의 뒷돈을 받아 챙기고 청탁 내용대로 자문한 것은 물론 그 결과를 브로커에게 미리 알려주기까지 한 것이다.

비리가 적발된 의사는 총 5명으로 그중 2명은 죄질이 무거워 구속기소됐다. 이처럼 장해등급 심사가 엉터리로 이뤄지다 보니 한 산재지정병원 원무과장은 처갓집 인근에서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자 의사 H씨에게 부탁해 사고 다음 날 ‘병원에서 근무 중 미끄러져 다친 것’으로 허위진단서를 발급받아 산재보상금 지급을 신청하기도 했다. 이 원무과장은 허위 목격자의 진술서까지 첨부해 산재보상금 1810만원을 유유히 타냈다.

검찰의 이번 수사로 근로복지공단이 운영해 온 자문의 제도 개선이 꼭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장해진단서를 환자를 거치지 않고 산재지정병원에서 바로 공단으로 송부토록 함으로써 환자가 사전에 주치의의 장해등급 결정 내용을 알 수 없도록 함으로써 주치의 진단의 객관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지금은 자문의가 재해자 이름 등 인적사항을 알 수 있는데 재해자 이름을 익명처리함으로써 자문의가 환자 개인정보를 알 수 없도록 해 비리 발생 여지를 차단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검찰 관계자는 “장해등급 조작은 제도의 공적 신뢰를 무너뜨리고 성실하게 산재보험료를 납부한 사업주 및 국가의 부담을 가중시켜 결국 모든 국민에게 피해를 끼치는 중대한 범죄”라며 “환자에게 산재브로커를 소개하는 병원에 대한 산재지정병원 취소 등 제재조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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