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한 달 뒤인 5월23일 한국전쟁 때 사망한 제8군 군인을 위령하는 제8군 전몰자 기념비도 해체되어 평택으로 옮겨졌다. 기념비의 지대석(址臺石)을 제외하고 기단(基壇)과 기념비, 그리고 병풍처럼 둘러친 주석(柱石)들을 모두 가지고 간 것이다. 주한미군은 오는 7월 제8군 사령부의 개청식 때 기념비 제막식도 병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한국 언론은 워커 장군 동상의 이전식 때와 달리 이 움직임을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그런데 제8군 전몰자 기념비에는 또 다른 사연이 하나 숨어 있다. 기념비는 일본군이 세운 충혼비에서 지대석과 기념비만 바뀐 시설물이기 때문이다.(사진 1과 2 비교). 충혼비는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했을 당시 랴오둥반도 일대로 출동했다 사망한 보병 제78연대 일본군 병사를 추모하기 위해 1935년에 세워진 위령비였다. 충혼비는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일부가 파손되었다. 전쟁 중에 제8군 공병대가 재건축을 시작하여 1953년에 기념비로 탄생하였다.
사진1/제8군 전몰자 기념비(2015년 촬영). |
사진2/일본군 충혼비. 출처/<보병 제78연대사> |
탈맥락화되어 있어 관심있게 보아야 알 수 있지만, 우리의 주변에서도 일본이 사용한 충혼비 등의 기단을 한국전쟁과 관련된 기념탑 등에 활용한 경우는 종종 있다. 기념비는 1978년 한·미 연합군 사령부의 청사가 준공됨에 따라 메인포스트 유엔거리의 모퉁이로 100m 이동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처럼 기념비에는 군사력을 앞세운 일본에 지배당한 한국근대사의 아픔이 묻어 있다. 동시에 한국전쟁이란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고통이 새겨져 있다. 더 나아가 한국 땅에 있는 타국 영토인 용산기지와 한·미관계를 조망할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흔적도 드러나 있다. 결국 기념비를 누구의 소유물로 접근하면 누군가의 역사는 소거(消去)당할 수밖에 없다.
경과를 보건대 주한미군 측은 자신의 소유물이란 입장에서 당연한 듯이 가져갔을 것이다. 문화재청, 국방부의 주한미군기지이전사업단과 국토교통부의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에서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거나 주한미군 측의 관점에 동의했을 것이다.
용산기지에는 건물을 제외한다 하더라도 기념비와 같은 역사유적이 많다. 그래서 올해 말까지 같은 현상이 반복될 우려가 있다. 공원화한 이후에는 제거당한 역사를 기억하는 한국인이 더 늘어날 것이다. 결국은 한국인의 대미 감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가 9조원을 들이는 기지의 이전과 ‘국가공원화’ 사이에서 한국과 미국은 기념비 등 역사유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우선 기념비는 되돌려놓아야 한다. 용산기지는 식민과 냉전, 그리고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분단을 동시에 드러낼 수 있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1945년까지로 용산기지의 역사성을 제한하려 한다면 그것은 절름발이 공원화일 뿐이다.
기념비의 반환에 멈추지 않고 기지의 특수한 역사를 반영하는 기억장치를 서로 공유하고, 일방성 대신 동맹에 어울리는 호혜성의 측면을 함께 향상시키려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 기본 방향은 상대의 아픈 역사를 보듬고 함께한 기억을 확대하려는 데서 찾아야 한다. 위령비와 추모비라는 말과 달리 산 자에게 과거사를 상기시켜주는 사회조형물이라는 기념비의 참뜻을 진득한 노력의 과정을 거쳐 한국과 미국이 함께 공유했으면 한다.
<신주백 연세대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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