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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법원은 민주주의 실험 중…“판사들 토론 이제 물꼬 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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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법관회의 이후 일주일

회의 결과 두고 ‘게시판 논쟁’

양 대법원장 사퇴-반대 공방도

법원 안팎 “조직 건강성 증거

사법부 한단계 발전 계기 되길”



한겨레

25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의 모습.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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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 판사 대표 100명이 모인 전국법관대표회의(법관회의)가 지난 19일 독자적인 ‘사법부 블랙리스트’ 추가조사와 회의 상설화 등을 결의한 뒤, 고요하던 법원이 모처럼 시끄럽다. 법원 내부 통신망(코트넷)엔 법관회의 결의 내용을 둘러싸고 찬성과 반대, 재반박, 비난, 자제요청 등 다양한 관점의 글들이 숱하게 올라왔다. 의견이 어느 한 쪽으로 모이진 않았지만, 그동안 사법부 현안에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수많은 판사들이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내부 갈등과 대립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시끄러운 민주주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익명게시판이 큰 구실을 했다. 법원행정처는 지난 5월 법관회의를 앞두고 실명으로 운영되던 코트넷에 최초로 익명게시판을 만들었다. 회의 직후부터 결과에 대한 평가와 의견을 중심으로 평소보다 더 많은 글이 익명게시판에 올라왔다. 익명에 의지해 이어지는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표현들은 이전에 볼 수 없던 것들이었다.

토론은 법관회의를 비판하는 글들로 시작됐다. 한 판사는 “격의 없이 다양한 의견을 토론하는 자리가 아니라 미리 준비된 의안을 발의자가 판사들을 설득해가며 결론을 끌어가는 방식이었다”며 “안건에 의문을 제기하는 판사들은 마치 준비도 안 되고 생각도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 분위기였다”고 썼다. 반면 또 다른 판사는 “추가조사, 법관회의 상설화, 책임규명 세 가지 의안 모두 찬성 의견이 훨씬 많아서 생각보다 이 사안에 대한 문제의식이 상당했다고 느꼈다”며 “내실 있는 반대의견이 별로 나오지 않았고 토론을 계속할 것인가 자체도 표결했기 때문에 회의 진행방식이 일방적이라고 볼 수 없다”고 반박했다.

법관회의 결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전선을 양승태 대법원장 사퇴 요구까지 밀고 나갔지만, 이에 부정적인 이들은 법관회의 자체의 정당성을 문제 삼기도 했다. 한 판사는 “평판사들 사이에서 이번 일은 결국 대법원장께서 책임질 일이라 말씀하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 사법행정권 남용에 대해 책임을 지셔야 한다. 스스로 물러나 주시고 사법부가 새로운 길로 갈 수 있도록 용단을 내려달라”고 호소했다. 또 다른 판사도 양 대법원장을 향해 “얼마 남지 않은 임기에 연연하지 말고 지금 물러나라”고 했다. 반면 일부 판사들은 “결의 내용이나 표현이 너무 강해 판사들의 총의를 대변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법관회의 구성원 중 특정 연구회 회원 비율을 공개하라”, “판사회의에서 선출됐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할 수 있었다”며 회의의 대표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법관회의 소집 때까지 별말 없다가 실제 의결이 되자 뒤늦게 회의의 기본부터 흔들어 보려는 것 같다”는 반론이 뒤따랐다.

일방적인 비방이나 상대를 조롱하는 듯한 글이 올라오자, 김창보 법원행정처 차장이 “특정인에 대해 민형사상 문제가 될 수 있는 글은 자제하라”고 나서기도 했다.

치열했던 일주일이 지나면서 최근엔 ‘게시판 논쟁’을 두고 사법부 개혁 논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자체 진단도 나오고 있다. 한 판사는 “판사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는데 물꼬가 트였다. 혼란스러워 보일 수 있겠지만, 판사들이 내부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토론한다는 것은 조직이 건강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판사도 “과거 법관회의가 여러 차례 열렸지만 어떤 결의사항이 나온 것은 처음이어서, 판사들이 각자 의견을 밝히는 논의의 장도 이제 시작된 것”이라며 “내부 합의 과정에서 겪는 진통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한 판사도 “그 정도 결의 수준이라면 자신을 대표로 선출한 법원 판사들의 의견을 다시 들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있다”면서도 “내부 논의가 정리되는 데 시간이 필요한 만큼 싸움으로 몰아가지 말고 기다려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황도수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그동안 판사 사회가 경직돼 있었고, 판사들은 판결로만 말하라는 분위기 때문에 하지 못했던 주장들이 이제야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며 “판사들이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 올바른 길을 모색하는 일이기 때문에 ‘결론’만큼이나 ‘과정’도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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