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은 됐어”
나의 꿈은 목회자였다. 어릴 적부터 신앙생활을 했으며 커서 목회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익환 목사님을 처음 본 것은 1991년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강경대군이 죽은 지 며칠 후 있었던 연세대 집회현장에서였다. 열사들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언제나 철거민, 농민, 노동자, 비전향장기수 등 소외받고 고통받는 약자들에게 다가서던 목사님을 볼 때마다 나도 저런 목사가 되어야지 싶었다. 목사님은 윤동주 시인의 친구이기도 하다. 유년 시절부터 평양숭실중학교, 청년 시절을 같이 보낸 동주를 해방을 불과 6개월 남겨놓고 잃은 뒤 그의 시를 읽으며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목사님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평양 방문이다. 어느날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엉뚱하다 싶은 시를 쓰더니 시가 새가 되어 분단의 장벽을 넘어 평양으로 날아간다. 김일성 주석과 손을 꼭 잡고 힘주어 말한다. “분단 50년을 넘기지 맙시다. 분단 50년을 넘기는 것은 민족의 수칩니다.”
신학자로 또한 큰 족적을 남긴다. 구약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한 일이다(우리말성서). 성서번역과 함께 시를 썼다고 하니 목사님에게 신앙과 시는 시대를 껴안을 수 있는 무기였나 보다. 아픈 자들에게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예수의 말을 실천한 문익환 목사, “통일은 됐어” 외치며 그 어떤 엄숙한 자리에서도 환희의 춤을 추던 문익환 목사. 그가 바라던 신명나는 해방의 나라, 통일의 나라, 예수의 나라가 어서 빨리 오기를 나도 한마음으로 노래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히브리서 11장 1절)
<이광석 뮤지션유니온 위원장>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 [인기 무료만화 보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