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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가 출범하고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처절하게 파괴된 상식이 회복되고 비정상이 정상화되면서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충만해지고 있다. 하지만 변화의 의지만으로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의 기대를 충족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새 정부는 적폐청산을 약속하고 있는데, 적폐 중 적폐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과 남용이고 다방면으로 구조화된 불평등이다. 이를 해소하는 것이 경제민주화다. 경제민주화는 경제 정의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활력을 잃어버린 한국 경제의 회생을 위해서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과제다. 문재인 정부만큼은 경제민주화에 성공하는 정부가 되길 간절히 바라면서, 역대 정부의 경제민주화 혹은 재벌개혁 약속이 허언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까닭을 살펴보고 경제민주화 성공의 조건을 짚어본다.
역대 정부가 경제민주화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재벌의 힘이 워낙 막강하기 때문이다. 재벌의 구조적 힘은 재벌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막강한 영향력을 일컫는다. 이 때문에 청와대의 주인은 누구라도 경제활성화를 위해 재벌의 협조를 구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재벌이 투자와 고용에 적극적으로 나서주면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당장 성장률이 눈에 띄게 올라가고 민생이 개선될 것이라는 생각을 피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재벌기업들의 의사결정은 정치적 고려가 아닌 수요 전망과 사업전략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역대 대통령들은 항상 이 유혹을 피하지 못했다. 그리고 재벌에게 투자와 고용을 구걸하는 순간 개혁의지는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재벌은 구조적 힘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심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많은 국민이 경제성장의 주축은 재벌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고, 따라서 만약 경제가 어렵고 재벌이 정부를 비판한다면 그 정부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많은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재벌은 정치권과 관료사회, 법원과 검찰, 언론과 학계 등에 광범위한 장학생과 지원군을 확보해놓고 있다. 이러한 재벌의 막강한 힘 앞에 김대중 정부도 노무현 정부도 무릎을 꿇고 말았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둘째, 지도자의 인식과 의지, 그리고 전략이 재벌의 강고한 저항을 돌파하고 경제민주화를 성공시키기에는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무엇보다 경제민주화가 경제성장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정되고 활기찬 성장을 위해서 필수적인 성장체제 전환의 열쇠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이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강력한 정치적 의지를 지녀야 한다. 또한 지도자는 경제민주화를 향한 밑으로부터의 열정을 끌어내 개혁의 동력으로 삼는 정교한 전략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민주화를 하향식으로 한다는 것은 형용모순이다. 과거 정권과 지도자들은 이러한 인식도, 이에 합당한 추진전략도 결여하고 있었다. 필자가 김종인씨의 경제민주화론을 신뢰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그는 권력의 칼자루만 쥐면 그 힘으로 간단히 경제민주화를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말해왔고, 그래서인지 항상 권력의 향배를 좇아 기웃거렸지만 경제민주화를 위한 어떤 정교한 전략도 제시한 바가 없다.
셋째, 경제민주화를 뒷받침할 강력한 정치세력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사실 ‘87년 체제’의 특징 중 하나는 경제·사회 정책에 관해서는 여야 간에 별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87년 체제’하에서 정권은 여러 번 바뀌었으나, 재벌공화국은 변함이 없었다. 국가는 뒤로 물러나고 시장에 모든 걸 맡긴다고 하는 정책, 즉 경제권력이 마음대로 활개 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시장화 일변도의 정책은 정권과 관계없이 거의 일관되게 추진되었다. 우리나라 정치에서 그동안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은 사실상 북한에 대하여 유화정책을 선호하느냐 압박정책을 선호하느냐였고, 사회·경제 정책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최근 여야의 핵심적 쟁점으로 거론되어온 법인세만 하더라도 이명박 정부뿐만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모두 인하했던 것이다. 실제로 여야 간에 정책 차이가 별로 없다는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하면서 지적한 사실이다.
이런 문제들이 지금은 그다지 심각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대다수 거대 재벌들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탓에 지금은 발언권이 매우 약화되어 있으며, “재벌도 공범이다”라고 외친 촛불시민들에 의해 새 정권이 탄생했기에 어느 때보다도 정부와 정치권의 경제민주화를 향한 정치적 의지도 높아 보인다. 그러나 과거 외환위기 당시를 돌이켜보면, 재벌개혁을 위한 사회적 합의나 정치적 분위기가 결코 지금보다 약하지 않았다. 정치적 상황은 가변적이어서 문재인 정부가 여러 정책적 난제를 앞에 두고 신통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전세는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새 정부가 경제민주화에 성공할 수 있을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재벌이 경제민주화에 저항하지 않고 스스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기존의 의식과 관행에서 벗어나 목전의 이익이 아닌 근본적인 경쟁력을 키우는 일에 집중하고, 이를 위해 선진적인 지배구조를 갖추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집단으로 환골탈태하는 것이 스스로의 미래를 위해서도 올바른 길임을 인식해야 한다. 개혁에 대한 저항이 아닌 솔선수범을 택해 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나 이는 희망사항일 뿐이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정부의 의지다. 경제민주화야말로 한국 경제를 살리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방안이라는 믿음에 기초해서 정부가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경제민주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정치적 동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정치권에서 개혁을 위한 협치를 구축하는 것과 아울러 경제민주화의 수혜자들을 중심으로 한 아래로부터의 개혁 동력을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 재벌개혁도 노동개혁도 결코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일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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