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 넘는 ‘시험의 한국사’ 해부
“개천 용은 신화…과잉보상 심각”
시험국민의 탄생
이경숙 지음/푸른역사·2만5000원
한국에서 시험은 국민 공통의 체험이자 울고 웃는 ‘인생 기억’이다. 신간 <시험국민의 탄생>은 고려시대 과거제부터 사법시험 폐지까지 1천년이 넘는 ‘시험의 한국사’를 총망라한다. 한국인이 왜 이토록 시험에 집착하는지, 그동안 어떤 시험을 치러왔는지, 시험이라는 ‘사회적 디엔에이(DNA)’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살피는 대기획이다. 한국이 그 어떤 나라보다 ‘시험 과잉’ 상태에 처해 있으며 폐해 또한 심각하다는 논지를 분명히 했다.
지은이 이경숙 박사(교육학·경북대 강사)는 ‘일제시대 시험의 사회사’라는 학위논문으로 2008년 한국교육학회에서 주는 박사학위논문상을 수상했고 2012년 한국연구재단 지원을 받아 이 연구를 수행했다. ‘시험’을 주제로 10년 넘게 이어온 연구 성과를 총정리한 셈인데 각종 사료, 문헌자료, 관련자 인터뷰 등을 종합한 초고를 쓰고도 2년 이상 원고를 다듬었다. 이런 숙고의 과정 덕에 책갈피마다 빈틈없는 역사적 사실과 교육철학적 분석이 서로 깊이 연관되며 밀도감 있는 이야기가 유장하게 흘러간다.
한국인은 왜 시험에 집착할까. 사진은 2015년 6월23일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일제고사) 장면.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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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험을 시행하겠다고 선포한 고려시대 광종(958) 이후 조선은 과거시험을 정착시켜 수험문화가 꽃을 피웠다. 과거가 폐지된 것은 1894년 갑오개혁 때였다. 일본식 교육과 선발제도를 도입하며 외국어 능력이 중요하게 대두됐다. 1920년대 경성제대 예과 입시에서는 영어시험을 치렀고 영어웅변대회가 열렸다. 영어레코드 끼워 팔기 같은 최신식 영어교육법이 보급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후 교원양성시험, 고등고시, 신문사 기자 공채에서도 영어시험을 쳤다. 그 시절 이미 한반도에서 외국어 능력은 “출세의 통로” “사람들을 서열화하는 도구”로 자리잡았다.
해방 뒤에도 개인은 여전히 국가 발전을 위해, 분단 극복을 위해, 부모를 위해, 안정된 삶을 위해 시험에 목을 맸다. 국가 시험은 확실한 출세의 관문이었지만 생각만큼 평등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시험은 여성, 장애인, 시위경력자 등 사회경제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자들을 오랫동안 배제했다. 국가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한 서열화 장치를 가동했다. 출제권리를 독점하며 평가권력까지 거머쥐었다. 부당한 노동대가, 기본권 침해, 불공정한 특혜, 차별을 시험으로 정당화하고 내면화했다. 서열주의는 국민을 통제하는 손쉬운 수단이었고, 통치자의 이데올로기를 관철할 수 있는 편리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1981년부터 국가는 대학입학시험을 전적으로 관장했다. 2010년대 수능시험 성적은 군인 선발의 일차 자료로도 활용되어 지원자들의 ‘입대전쟁’을 낳았다. 신뢰의 이유는 분명했다. 국가가 동일 연령 국민 거의 모두를 대상으로 인지적 역량을 견줘 점수와 등급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시험을 잘 치면 좋은 학벌, 선망하는 직종 취업, 고임금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또 엘리트들은 기존 서열을 고착화하거나 기준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변경할 수 있다. 게임 규칙을 다른 이들보다 손쉽게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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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화는 능력주의의 신화, ‘과잉 보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폭력적 성격을 강화했다. 비정규직의 투쟁에 “새치기”라 냉소하고, 학벌과 서열을 “노력의 정당한 대가”라며 지지하는 것, ‘기균충’(기회균등선발제 입학생), ‘지균충’(지역균형선발제 입학생)이라 배제하는 것 또한 이런 폭력적 현상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지은이는 설명한다. 사람들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강자의 논리로 약자를 위협하지만 ‘개천의 용’은 상상 속의 동물이었다. 1988년 사법시험에서 고졸 합격자는 단 두명. 그 뒤 2001년까지 고졸 합격자는 한명도 없었다. 2002년부터 2013년까지 사법시험에 응시한 25만9287명 중 최종합격자는 8847명이었고 이 중 전문대졸 미만의 합격자는 10명에 불과했다.
문제는 시험으로 사회경제적 지위 대물림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 중산층 이상의 “전투적 교육가족”들은 계급 상속 전략으로, 수험생에게 사회·경제·문화적 자원을 집중 투입한다. 입시전쟁 꼬리칸에 겨우 탑승한 저소득층도 마찬가지. 부모는 밤낮없이 일해가며 아이들을 지원하고 “나처럼 안 살려면” “정신 차리라”고 자식들을 으르고 달랜다. 특권층은 ‘사회적배려대상자’ 전형을 변칙·반칙 창구로 썼다. ‘교육농단’을 통해서까지 자본과 계급을 재생산하고 모든 유리한 고지를 점한 ‘금수저’ 가족이 있는 반면, 저소득 가정의 아이들은 빈곤·왕따·학교폭력·가출 등 모든 생활 문제를 몽땅 겪는다. ‘용’은 개천이 아닌 강남에서 나오고, ‘강남 엄마’는 모성신화와 기괴함 사이에서 찬사와 비난을 오갔다.
<시험국민의 탄생> 지은이 이경숙 경북대 강사. 교육철학과 사학을 전공한 그는 방대한 자료와 10년여 연구 결과를 이 책에 담았다. |
개인은 시험을 통해 일분일초 급박하게 다투며 시간을 아끼는 경험을 익혔다. ‘사당오락’의 수면 시간, ‘시험기계’가 되기 위한 생체리듬 관리, 조기유학, 선행학습 등에서 속도와 능력을 동일시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밖에도 책은 커닝, 객관식 시험 도입, 지능검사, 이승만 아들의 서울대 낙하산입학 소동, 1960년대 서울 전기 중학교 입시문제를 두고 펼쳐진 그 유명한 ‘무즙 파동’과 어머니들의 ‘치맛바람’, 시험에 저당잡힌 청춘의 비극, 학교생활기록부가 가진 폭력성 등을 다룬다. 24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지은이는 “시험이 절대악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과잉 보상과 능력에 대한 과대 포장, 배제된 사람들을 쓰레기처럼 버리는 신화가 지나치다. 시험 결과로 내가 과도하게 좌절했거나 지나친 오만을 부린 건 아닌지, 시험을 통해 일분일초를 다투며 살게 된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약자에게만 지나치리만큼 가혹한 시험과 평가의 굴레에서 해방된 사회를 논하자는 제안이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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