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적의 길
이정동 지음/지식노마드(2017)
지상 123층 롯데월드타워에는 한국 산업의 현주소가 드리워져 있다. 첨단 건축기술의 집합체인 이 빌딩에 한국 기업의 존재감은 없다. 고난도 기술인 터파기 설계, 구조설계, 풍동설계는 모두 원천기술을 가진 외국업체가 맡았고 한국 업체는 설계도대로 시공을 했다. 물론 빠르고 효율적인 실행 능력은 중요하다. 이런 재능 덕분에 한국은 제조업 강국 소리를 들으며 세계 10위권 경제를 이뤄냈다. 하지만 한계가 점점 뚜렷하다. 설계도대로 물건 만드는 것이라면 중국, 베트남 같은 후발국이 적은 비용으로 더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조선, 건설, 스마트폰, 철강, 자동차, 디스플레이 등 주력 산업 곳곳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기업의 활력은 사그라지고 청년실업 문제는 끝내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높다. 서울대 공대 교수들은 원인과 처방을 연구했고 그 결실이 2015년 9월 나온 책 <축적의 시간>(지식노마드)이다. 이 책은 우리 산업의 가장 큰 문제가 ‘개념설계 역량의 부재’라고 진단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개념설계란 존재하지 않는 것을 흰 종이 위에 그려내는 것이다.
한국 산업은 개념설계 단계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지체돼 있다. 로켓으로 치면 추진력이 소진된 1단계 엔진을 분리할 고도가 훨씬 지났지만 계속 그 관성으로 날고 있는 것이다. 동료 교수와 함께 쓴 <축적의 시간>을 기획한 이정동 서울공대 교수가 최근에 후속으로 <축적의 길>을 내놨다. 앞의 책이 ‘진단’이라면 새 책은 ‘처방’이다.
이 교수는 실행과 개념설계는 접근부터 다른 것을 인정해야 비로소 길이 보인다고 말한다. 둘은 비슷해 보여도 “며느리와 쥐며느리만큼이나 다르다”는 것이다. 실행이 중심이 될 때는 ‘어떻게’ 할지가 관심이지만, 개념설계를 해야 할 때는 ‘왜’를 질문해야 한다. 그래야 독창적인 밑그림이 나온다. 실행에서는 ‘효율성’이 바람직한 판단 기준이지만 개념설계에서는 ‘차별성’이 기준이다.
저자는 “한국사회는 도전적 시도와 시행착오의 축적을 가로막고 있는 루틴(관행)들이 가득하다”며 혁신의 방법으로 4가지 열쇳말을 제시한다. 바로 △고수의 시대(축적의 형태) △스몰 베팅 스케일업 전략(축적의 전략) △위험공유 사회(축적지향의 사회시스템) △축적지향의 리더십(축적지향의 문화) 등이다. 전문가를 키워내지 못하는 조직에서 개념설계가 탄생하지 않는다. 고수, 괴짜, 덕후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한방에 큰 것을 기대하는 ‘선택과 집중’도 옛말이다. 어느 구름에서 비(개념설계 성공)가 내릴 줄 모르니, 작은 아이디어들을 검증하고 발전시켜 나가는(스케일업) 전략이 더 유효하다. 시행착오 한번에 인생이 망가지는 사회에서 진득한 축적은 가능하지 않다. 무엇보다 위험을 평가하고 분담해주는 금융의 제역할이 절실하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정치인과 기업 경영자의 리더십이다. 누구도 먼저 움직일 수 없는 ‘죄수의 딜레마’를 끊어내는 리더십이 오늘과 다른 내일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bhlee@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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