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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 (화)

천의 질감이 그대로, 상추가 살아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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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세상을 그리다] 상추씨

상추씨

조혜란 글, 그림

사계절 발행ㆍ40쪽ㆍ1만1,500원
한국일보

그림책의 모든 장면은 퀼트 입체 작품을 촬영해 천의 질감, 땀땀이 공들인 홈질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사계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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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 좋고 바람 좋으니, 무엇이든 심고 가꾸기 좋은 때이다. 도시 주택가 곳곳에서도 한 뼘 빈 터 한 줌 흙에 물주고 김매며 가꾸는 손길을 만나곤 한다. 땅을 부동산으로 셈하는 이들이 세웠을 ‘경작 금지’ 팻말이 머쓱하도록, 아스팔트 콘크리트 세상 여기저기를 비집고 푸릇푸릇 자라는 생명이 꽃 못지않게 어여쁘다. 갓 딴 상추ㆍ풋고추ㆍ파ㆍ쑥갓이 푸짐한 싱싱 밥상에 둘러앉아 식구들이 서로서로 볼이 미어지도록 쌈밥을 먹여주는 정경이 절로 떠오른다.

조혜란의 그림책 ‘상추씨’는 상추만큼이나 건강하고 생생한 어조로 그러나 작가 특유의 익살은 잊지 않은 채, 씨 뿌려 가꾸고 거두어 먹는 일의 기쁨에 대해 얘기한다. 한마디로 ‘경작 본능’을 불러일으킨다. 돌멩이로 울타리 친 딱 한 가족이 먹을 만큼의 손바닥 텃밭, 거기에 다가와 깨알 같은 상추씨를 뿌리는 작고 빨간 장화의 주인공은 최초의 농부 같다. 서툰 솜씨 탓에 몇 톨은 울타리 바깥으로 훌훌 날아가는 상추씨! 라이프니츠 대학 식물생태학 교수 한스외르크 퀴스터가 ‘곡물의 역사’에서 재배 식물 경작이야말로 문명과 국가를 만든 인류 최대의 사건이었다고 힘주어 말한 대목의 구현이랄까.

콩 심은 데 콩 나듯 상추씨 뿌린 자리에 상추 싹이 났다. 바람 맞고 비 맞고 햇빛 쬐며 어느새 울타리 넘치게 쑥쑥 자랐다. 빽빽이 자란 어린잎은 ‘군데군데 솎아 먹’고, 좀더 자란 큰 잎은 ‘뚝뚝 잘라’ 먹는다. 지금껏 웃고 놀라고 찡그리던 상추 잎들이 식탁에 오른 장면, 특히 고기며 회를 올려놓은 채 싱긋 웃는 입매를 하고 얌전히 눈 감은 상추잎을 보라. 사물에 눈 코 입 그려 넣은 그림을 편치 않게 여기는 독자조차 웃음 터트리게 만든다. 햇빛 쬐고 비 마시고 바람 맞으며 쑥쑥 자란 것으로, 싱싱하고 푸짐한 밥상을 차린 것으로 상추는 제 할 일을 마땅히 다 했다는 것이다.

‘상추씨’의 모든 장면은 퀼트 입체 작품으로, 촬영 작업 후 세심한 보정을 거쳐서 천의 질감과 그 위에 땀땀이 공들인 홈질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천을 오리고 잘라서 꿰매고 덧붙여 수놓은 솜씨는 풋풋하면서도 맵짜다. 그렇게 이뤄진 푸성귀의 이채로운 이미지는 낯설고도 새롭고 유쾌하다. 작가의 전작들이 보여준 능란한 붓 솜씨와는 다르게 그러나 똑같이 정성스럽고 곰살맞다. 그리고 뒤 표지 안쪽 면지에 붙어있는 조그만 봉투 하나!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그림책을 사야 봉투를 열어볼 수 있다.

누구는 내일 지구가 망해도 사과나무를 심으리라 했다지만, 이즈음 특히 무엇인가 심어보고 싶고 가꿔보고 싶다. 우리 사회가 더도 덜도 없이 심은 대로 나는 땅이 되어줄까.

이상희 시인ㆍ그림책 작가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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