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소식지 통해 7회에 걸쳐 용산기지 역사 소개...6월호에 ‘원조 환구단’ 남단(南壇) 소개 글 실려
용산구(구청장 성장현)가 미군부대 용산기지의 평택 이전을 앞두고 구 소식지를 통해 ‘우리가 반드시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과 생태환경’이란 주제로 7회에 걸쳐 용산기지의 역사를 소개했다.
25일 발행된 용산구 소식지 6월호에는 ‘원조 환구단, 용산에 있었다?’라는 제목으로 용산기지 북쪽 외곽 캠프 코이너(Camp Conier)에 남아있는 ‘남단(南壇)’ 유구를 소개하는 글이 실렸다.
남단은 조선시대 역대 왕들이 행차해 제천 행사와 기우제를 거행했던 장소다.
당초는 원구단(?丘壇)으로 불렸으나 조선 중기 이후 원구제가 폐지되면서 ‘남단’또는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으로 칭하게 된다. 지금은 기억 속에서 잊혔지만 조선 말기까지 종묘, 사직 다음으로 국가 의례를 빈번히 거행하던 의미 있는 장소였다.
김천수 소장 남단 석물(유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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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남교(南郊), 즉 남쪽 교외에서 제천례를 지냈다. 남단이 숭례문 밖에 있는 이유다. 마찬가지로 베이징 남쪽 교외에는 명·청 황제가 천제를 지내던 천단(天壇)이 남아 있다.
원구단과 관련된 논쟁은 조선조 내내 끊이지 않았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천자만이 할 수 있다”거나 “제후국인 조선에서 이를 거행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
그럼에도 많은 임금들이 남단을 찾아 제를 올렸다. 대표적인 인물이 개혁군주 정조다. 정조는 정치적 입지와 기반을 다지기 위해 남단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남단 주위에 정계석을 쌓고 나무를 심는 등 시설을 정비하기도 했다. ‘춘관통고(春官通考,1788)’라는 책에는 당시의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소식지에 관련 글과 사진을 제공한 지역사 연구가 김천수씨는 “중구 소공동에 남아있는 환구단은 우리의 자주성을 대표하는 유물”이라며 “그 환구단의 전신이 바로 이곳 용산에 자리했다는 사실은 용산 구민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라고 말했다.
구는 오는 연말까지 6개월에 걸쳐 소식지에 ▲만주사변 전병사자 충혼비 ▲만초천 ▲둔지산 ▲위수감옥 ▲정전협정 당시 테이블 ▲미소공위 당시 소련군대표단 숙소를 한 꼭지씩 추가로 소개한다.
특히 만주사변 전병사자 충혼비는 용산기지의 중층적 역사를 보여주는 대표적 유물이다. 일제가 만주사변(1931년) 당시 전병사자를 기리기 위해 1935년 비석을 건립했으나(매일신보, 1935.11.13) 미군 주둔 후 6.25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미8군 전몰자 기념비’로 명칭이 바뀌었다. 미군기지 이전에 따라 전몰자 기념비도 평택으로 함께 이전될 것으로 보인다.
구는 소식지 외도 다양한 방식으로 용산기지의 역사를 구민들에게 알리고 있다. 2014년에는 ‘용산의 역사를 찾아서’라는 책자를 발간·배포했으며 지난해 평생학습프로그램을 통해 구민 30명이 기지 내 근현대 역사유적지를 탐방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뚜벅뚜벅 용산 속으로’라는 제목의 지역 근현대사 특강이 이어지고 있다.
춘고나통고에 실린 조선시대 남단의 모습 |
26일 진행될 ‘철도와 병영의 신시가지 답사’에는 안창모 경기대학교 건축대학원 교수 동행으로 주민 20여명이 용산기지 주변 문화유산을 살펴본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정부의 미군기지 재배치 계획에 따라 용산기지의 평택 이전이 눈앞에 다가왔다”며 “공원 조성 과정에서 기지 내 가치 있는 문화유산과 생태환경을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기 바란다”고 전했다.
박종일 기자 dre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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