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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정규-비정규직 이분법 잣대론 경영혼란 불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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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제로’ 정책에 산업계 긴장

《 LG그룹 계열사인 LG전자, LG화학의 3월 말 기준 비정규직 비율은 각각 1.3%, 0.9%다. 반면 모바일, 자동차용 소재·부품 생산 기업인 LG이노텍과 이동통신업체 LG유플러스의 비정규직 비율은 각각 4%, 21%다. 같은 그룹이라고 ‘비정규직 우선 채용’이라는 경영 원칙을 적용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각 산업별, 기업별로 탄력적으로 인력을 운용하는 ‘각자의 이유’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공언하면서 민간기업 사이에도 정규직 전환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인천국제공항공사를 필두로 한 공공부문이 스타트를 끊자 민간 기업들도 비정규직 인력 채용 정책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전문가들은 다양한 산업 구조, 직무 특성 등을 무시한 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흑백논리’만 대입할 경우 상당한 혼란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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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차만별 비정규직 비율, 왜?

LG이노텍의 비정규직 비율은 ‘들쑥날쑥’ 변한다. 지난해 3월 기준 120명이었던 비정규직 인력은 12월 말 787명까지 치솟았다. 올해 3월에는 다시 330명으로 떨어졌다. 업종 특성 때문이다.

이 회사는 경기 파주, 경북 구미, 광주 등 5곳에 제조시설을 갖추고 카메라모듈, 반도체기판, 차량용 통신부품 등을 생산하고 있다. 문제는 스마트폰 제조사, 자동차 제조사 등 주요 고객의 요구에 따라 생산물량 변동 폭이 심하다는 데 있다. LG이노텍은 3∼6개월씩 단기 생산인력을 채용해 물량 변동에 대응하고 있다. 이른바 필요할 때마다 ‘생산 대응 인력’을 고용한다는 뜻이다.

같은 업종이라도 기업들의 고용 구조는 달라질 수 있다. LG유플러스(21%)는 경쟁사인 SK텔레콤(4%), KT(3%)에 비해 비정규직 비율이 월등히 높다. 하지만 이는 스마트폰을 판매하는 직영점 판매 인력을 본사에서 직접 고용하고 있어서다. SK텔레콤과 KT는 이 인력들을 각각 PS&M, KT M&S라는 자회사를 두고 관리하고 있다. 최근 비정규직 5200명을 정규직화하겠다고 발표한 SK브로드밴드도 SK텔레콤이나 KT와 같은 형태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어떤 고용 형태가 정답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한다. 동일 업종이라도 획일화된 잣대를 들이대긴 힘들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4일 집무실에 일자리 현황판을 설치하면서 개별 기업들의 일자리 창출 동향 외에도 비정규직 비중 추이도 살펴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기업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숫자 경쟁’은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을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비정규직 채용 규모를 줄여야 한다는 방향성은 동의하지만 일부 기업의 비정규직 채용 인력은 각 산업적 구조의 특성에 따른 결과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 제조업은 사내하청·간접고용이 뇌관

기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기존 정규직과의 임금 격차도 상당한 걸림돌이다. 임금 격차가 크지 않은 일부 유통업체는 모든 직원의 정규직화라는 ‘결단’을 내리더라도 부담이 적은 편이다. 반면 ‘정규직 고임금 구조’를 가진 많은 기업은 고민이 커질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 근로자 수백, 수천 명의 처우를 당장 정규직 수준으로 올려주기도 어려운 데다 기존 정규직 근로자들도 기득권을 놓지 않고 있어서다. 송경진 세계경제연구원장은 “결국 정규직의 양보 없이 비정규직 문제 해결은 힘들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는 이런 문제에 일찌감치 직면했던 기업이다. 현대차는 2015년 6000명의 협력업체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법원이 사내 협력업체 직원을 현대차가 고용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 후였다. 현대차는 실제 2015년 4000명, 지난해 1200명의 협력업체 직원을 정규직으로 채용했고, 올해 마지막 800명에 대한 전환 작업을 마무리한다. 다만 현대차의 경우 사내 협력업체 직원들이 정규직 직원들과 같은 생산라인에서 거의 비슷한 일을 한다는 점이 감안됐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원칙이 적용될 만했다는 얘기다.

김장호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대자동차 사례는 결국 기존 정규직 근로자와 사내하청 등 비정규직 근로자의 이중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방향성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비정규직 근로자는 물론이고 기존 근로자와 기업이 모두 일정 부분 양보하면서 적절한 수준에서 합의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협력업체 직원 고용 비중이 높은 조선업과 철강업 등에서는 현대차 사례를 주시하고 있다. 인건비 부담이 비교적 덜한 협력업체 직원을 직접 고용해야 할 경우 대기업들은 직접적인 생산비 상승을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선업의 경우 일감이 일정하지 않은 수주 산업이라는 문제도 남는다. 조선업 경기가 큰 폭으로 변하는데 모든 근로자를 직접 고용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것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고용 문제는 궁극적으로 기업의 수익성, 경쟁력 강화와 인건비 문제 등과 직결된다. 직무에 따른 성과나 임금체계에 대한 고민 없이 이분법적인 정규직 전환을 강조하면 오히려 기업의 구조조정, 일자리 감소 등 부작용도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서동일 dong@donga.com·김도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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