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극’ 두사람, 바티칸서 첫 만남
24일 오전 8시 반(현지 시간) 바티칸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처음 만나 30여 분간 비공개 대화를 나눈 프란치스코 교황은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나무 가지가 그려진 메달을 트럼프에게 주며 스페인어로 이렇게 말했다. 이란을 맹비난하고 무작정 이스라엘 편을 들면서 중동에서 긴장을 키우고 있는 트럼프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이 “각성하라”는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보낸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통역을 통해 교황의 말을 알아들은 트럼프는 “우리는 평화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라고 화답했다고 이날 로이터통신 등이 보도했다.
교황이 올리브나무 메달과 함께 트럼프에게 교황청이 2015년 발간한 기후변화와 환경보호 관련 회칙인 ‘찬미 받으소서’를 준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 회칙에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정책 개발을 전 세계 국가에 촉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하려는 등 반(反)환경 행보를 보이고 있는 트럼프에게 훈계의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건넨 것이나 다름없다. 트럼프는 “읽어보겠다”고 답했다.
그동안 난민, 기후변화, 인권 등의 문제에서 사사건건 대립하던 두 ‘국제적 거물’의 역사적 첫 만남은 전 세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두 사람의 비공개 대화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교황청은 “화기애애했다”고만 전했고 트럼프는 헤어질 때 악수하면서 “오늘 말씀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교황과 만난 뒤 트위터에 “우리 세계의 ‘평화’를 추구해야겠다는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 굳세어졌다”고 올렸다. 기자들에게는 “교황과 함께 있었던 건 영광이었다. 환상적인 만남이었다”고 말했다.
트위터를 통해 온라인 설전을 벌이던 이들이 첫 오프라인 만남에서 의외로 친근감을 가졌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관측도 나온다. 국제적 영향력이 막대한 교황과 트럼프가 난민, 기후변화 등 세부 이행 방법에는 대립할 수 있지만 국제평화라는 보편적 가치에서는 공감대를 찾을 것이라는 기대 섞인 관측도 나온다.
부인 멜라니아 여사와 딸 이방카는 교황을 만날 때 여성 신자들이 전통적으로 착용하는 소매가 긴 검은색 드레스와 검은색 베일인 만티야를 써 예의를 갖췄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최근 교황이 엄격했던 드레스코드 대신 편안한 옷차림을 선호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상 밖의 일이라고 평가했다. 교황이 멜라니아에게 스페인어로 “남편에게 어떤 음식을 주느냐”고 묻자 “피자”라고 답해 교황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면담 전 사진기자들에게 포착된 교황의 얼굴은 경직돼 있었다.
교황이 국가 정상을 만나기에는 다소 이른 시간에 만남이 이뤄진 점은 둘의 불편한 관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당초 트럼프는 이탈리아 방문 계획을 일찌감치 정했지만 지난달 중순까지 “교황을 만나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밝혔다. 교황은 지난달 30일 “(트럼프 측에서) 회동 제의가 온 바 없다”면서도 “어느 정상이든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교황은 손을 내밀었으나 트럼프가 거절했다’는 식으로 해석될 여지가 생기자 백악관이 부랴부랴 바티칸에 SOS를 쳐 급히 일정이 잡힌 것이다. 교황청은 “뒤늦게 백악관에서 제안이 왔고, 이미 잡힌 교황의 다른 일정 때문에 이른 아침밖에 시간이 없었다”고 설명했다고 가톨릭 전문매체인 크룩스(CRUX)가 전했다.
트럼프가 대선에 출마한 뒤 멕시코 장벽 건설을 비롯한 반난민 공약을 발표하고 환경보다 경제를 앞세우는 태도를 보이자 교황은 이를 비판했고, 트럼프가 맞받아치며 두 사람은 앙숙이 됐다. 지난해 2월 교황이 멕시코 장벽 건설 계획을 비판하며 “(트럼프는)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지적하자, 개신교인인 트럼프가 “종교지도자가 한 개인의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밝히며 설전을 벌였다.
황인찬 hic@donga.com·윤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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