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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고려인 애환 함께한 고려극장 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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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15년 5월 16일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장군 고선지'의 한 장면.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당나라 총사령관까지 오른 고선지를 통해 고려인들이 겪는 이방인으로서의 애환을 표현했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한민족이 춤과 노래를 좋아했다는 기록은 중국 사서 '삼국지'의 위지 동이전이 편찬된 기원후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의 후예인 러시아 연해주 고려인도 나라와 고향 잃은 설움을 노랫가락으로 달래고 고된 노동의 피로를 춤사위로 떨쳐버렸다. 1920년대 말부터 신한촌구락부 연예부, 김니콜라이연주단 등 아마추어로 구성된 소인(素人)예술집단이 활발하게 활동했고 1930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노동자청년극장이 설립됐다. 이를 토대로 1932년 9월 9일 고려극장이 출범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극단이자 세계 유일의 고려인 민족극장, 한반도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한민족 공연단체의 시작이었다.

출발은 공산주의 사상 선전과 소수민족 관리를 위한 소련 정책의 일환이었다. 사회주의 혁명 정신을 기리거나 집단농장의 작물 증산을 독려하는 내용으로 무대가 꾸며졌고 노래 후렴구는 대부분 공산주의 체제를 찬양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민족 정서의 명맥을 이어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춘향전, 심청전 등 우리나라 고대소설을 연극으로 꾸몄고 민요 가락을 접목해 노래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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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있는 국립 고려극장의 현판식이 2012년 5월 18일 오후 개최됐다. 지긍의 고려극장 건물은 2002년 준공됐으나 현판 없이 지내오다 알마티 한국 지상사협회 지원으로 현판식을 열게 됐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하지만 곧 시련이 닥쳤다. 스탈린 정권의 결정에 따라 연해주 고려인들이 강제로 열차에 태워져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한 것이다. 고려극장 단원들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대부분 옮겨갔고 일부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로 떠났다. 고려극장도 둘로 나뉘었다가 1942년 우슈토베로 이전한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 1950년 통합됐다. 항일 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 장군이 만년에 고려극장 수위로 일하며 자신의 일대기를 그린 연극 '홍범도'를 지켜보고 1943년에 생을 마쳤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으로 고려인 거주 제한이 풀려 고려극장은 1955년부터 순회공연에 나설 수 있었다. 극장과 배우들의 위상도 높아졌다. 고려극장은 1959년 예전 자리로 옮겨가 크질오르다 주립이 됐다가 1966년 당시 수도인 알마티(1997년 아스타나로 수도 이전)로 이전하며 1968년 국립으로 승격됐다. 순회공연을 전문으로 하는 아리랑가무단도 이때 창설됐다.

1960년대 타슈켄트 예술대와 알마티 연극예술대 졸업생이 대거 입단해 고려극장은 활기를 띠었고 그 전성기가 8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소련 전역에 흩어져 살던 고려인들에게 고려극장이 순회공연 오는 날은 명절이고 잔칫날이었다. 동향 사람 소식과 친지의 안부를 듣는 통로이기도 했다. 러시아인을 비롯한 다른 민족들도 고려극장 단원들의 연기와 춤과 노래에 열광했다. 고려인을 그저 농사 잘 짓는 민족으로만 알고 있던 이들에게 고려극장 무대는 충격이었다. 공연을 보고 나서야 소련에 고려공화국이 없는데도 고려극장이 있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극장의 레퍼토리에서 민족적 색채는 점차 엷어졌다. 한국어를 못하는 가수와 배우가 늘어나고 한국어를 알아듣는 관객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초창기에는 연극이 중심이었으나 무용과 음악의 비중이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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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알마티의 고려극장 벽면에 그동안 고려극장 무대를 빛낸 배우와 가수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김소영 감독은 이 사진들을 보고 다큐멘터리 영화 '고려 아리랑-천산의 디바'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영화사 시네마달 제공]



고려극장의 존재가 우리 관객에게 알려진 것은 1980년대 말의 일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가 대거 참가한 것을 계기로 한국과 이들 나라의 문화 교류에 물꼬가 트이자 이듬해 고려극장도 창단 57년 만에 고국 나들이에 나섰다. 소련의 고려인들도 서울올림픽이 열리고 나서 TV에 비친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처음 봤다. 고려극장의 아리랑가무단은 1989년 9월 열린 해외동포예술단 초청공연에 타슈켄트 폴리트오젤극장의 청춘가무단, 타슈켄트에서 활동하는 록그룹 고려, 그리고 미국·중국·일본의 공연단과 함께 참가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카자흐스탄 등이 독립했다. CIS(독립국가연합) 각국에 민족주의가 대두하고 카자흐어 등이 공용어로 채택되니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처지가 힘들어졌다. 다시 연해주를 비롯한 러시아 지역이나 한국으로 재이주하는 고려인이 적지 않았다. 고려극장도 나라의 지원이 끊겨 운영난에 빠졌다. 1991년 알마티에 한국교육원이 문을 열고 이듬해 한국대사관이 개설되면서 고려극장에 숨통이 트였다. 1992년 한국 국립극단과 자매결연해 단원들이 모국 초청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한국 정부와 기업 등의 후원도 이어졌다. 현재 고려극장의 단원은 90여 명이며 연극단, 성악단, 무용단, 사물놀이팀을 두고 있다. 지금까지 300편가량 연극을 무대에 올렸는데, 한국어 대사를 구사하고 러시아어로 동시통역하는 원칙을 지켜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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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영화 '고려 아리랑-천산의 디바'의 실제 주인공인 방타마라가 16일 오후 서울 성동구 왕십리 CGV점에서 열린 시사회에서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25일 다큐멘터리 영화 '고려아리랑-천산의 디바'가 개봉한다. 김소영 감독이 고려극장의 전설적인 스타 이함덕(1914∼2002)과 방타마라(74)를 중심으로 고려극장의 발자취를 더듬은 작품이다. 이함덕은 고려극장 창단 멤버이자 1962년 김진과 함께 고려인 최초의 인민배우가 됐다. '춘향전' 1대 타이틀롤을 비롯해 100여 가지 배역을 맡았다. 방타마라는 고려인 아버지와 러시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풍부한 성량으로 무대를 휘어잡은 간판 가수였다. 영화에서는 이들이 연기하고 노래하는 자료 화면과 육성, 지인들의 회고담, 열심히 한국어 대사를 익히고 한국 전통무용을 배우는 현역 단원들의 모습 등을 만날 수 있다. 영화 개봉에 맞춰 내한한 방타마라는 지난 16일 언론시사회에서 영화를 처음 본 뒤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잊고 있던 윗세대가 겪은 고난을 생각하게 됐다"면서 "멀리 떠나 있는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해줘 감사하다"고 털어놓았다.

오는 9월이면 고려극장이 창단한 지 85주년, 연해주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지 80주년이 된다. 그 모진 세월을 견뎌낸 것만으로도 대단하지만, 모국과 단절된 채 거주 이전의 자유를 빼앗기고 한국어 교육이 금지된 가운데서도 한민족의 뿌리를 잊지 않은 집념이 놀랍다. 지금까지 고려극장이 고려인들의 시름을 달래준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고려극장의 빛나는 역사를 기억해주고 고려인들의 눈물을 닦아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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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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