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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매경춘추] 서리풀 원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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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시대마다 그 시대의 질병이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한병철의 책 '피로사회'는 현대사회가 과도한 성과주의로 인해 우울함, 허무감, 피로가 만연한 사회가 되었다고 진단한다. 어려서부터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 현대인들은 이제 남뿐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넘어서야 하는 절대적 경쟁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로 인한 우리 사회의 피로도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음악에 쉼표가 필요하듯 우리 삶에도 휴식이 필요하다. 휴식의 '휴(休)' 자는 '사람이 나무 그늘에 기대어 쉬는 모습'이라고 한다. 인간은 자연을 이용의 대상으로 여기며 살아가지만, 인간이 결국 돌아가 기댈 곳은 자연의 품속이다. 그래서인지 바쁜 일상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이라도 더운 여름날 밀짚으로 엮은 원두막에 앉아 솔솔 불어오는 산바람을 맞으며 수박 한 통을 쪼개 먹던 유년 시절의 추억 하나쯤은 가슴에 안고 살아간다.

자연이 만든 그늘에 비할 수야 없겠지만 도심의 그늘막도 사람들에게 작은 휴식처가 될 수 있다. 서초구에는 행인이 많은 횡단보도와 교통섬 등 54곳에 '서리풀 원두막'이 설치돼 있다. 서초의 옛 이름인 '서리풀'과 원두막의 추억을 함께 담아 만든 것인데, 교통신호를 기다리며 도심의 따가운 햇살을 피하거나 쏟아지는 비를 가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한다.

뜻밖의 곳에서 만난 공공기관의 배려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었던 것일까. '서리풀 원두막'에 대한 입소문이 퍼지면서 평소에는 무심하던 주민들도 자치단체의 정책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참신한 아이디어라며 더 확대되기를 바란다는 격려도 있었고, 강풍에 날아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쓸데없이 멀쩡한 보도블록 뒤집지 말고 이런 데 세금을 더 많이 써 달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을 보면서 주민들이 진짜 목말라하는 행정이 어떤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비록 작더라도 진실 어린 마음과 따뜻한 애정이 담긴 것에 감동한다. 막대한 예산을 들인 공공사업들이 때론 공허하게 다가오는 것은 주민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고, 불편해하는 것들에 대한 공감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의 일상은 크고 위대한 것들이 아니라 소소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른 20명가량이 들어서면 꽉 차는 그늘막 하나에도 사람들은 조그만 행복을 느낀다.

주민들의 입장을 잘 헤아려 만든 정책은 무더운 여름날의 시원한 원두막 그늘처럼 주민들 마음에 쉼과 여유를 안겨준다. 그리고 주민들로부터 사랑을 돌려받는다. 올여름은 어느 해보다 무덥고 길 것이라는 소식이다. '서리풀 원두막'이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에게 쉼표 하나를 선물하기를 바라 본다.

[조은희 서초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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