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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부처님오신날]연등 아래서 더 가난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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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마야사 주지 현진 스님

동아일보

서울 청계천에 설치된 연등. 부처님은 고뇌와 번민에 쌓인 중생들을 위해 이땅에 왔다. 그런 의미를 담은 연등 아래서 자신을 낮추는 하심의 배움이 필요하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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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살고 있는 절로 거처를 옮기고 다섯 번째 맞이하는 부처님오신날이다. 사월초파일에 즈음해서 활짝 피는 불두화(佛頭花)를 향기가 좋아서 여기 오자마자 묘목을 구해 와서 법당 뜰에 심었다. 올해는 봉축이라도 하듯이 때맞추어 만개했는데 눈송이를 뭉쳐 놓은 듯 순백의 향연이 더 곱다.

며칠 전 밤새 비바람이 휘몰아칠 때도 나는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소담하게 핀 불두화 가지가 꺾이고 쓰러질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에 여기저기 흩어진 꽃가지들을 정리하면서 간밤의 불청객이 원망스러웠다. 마치 단정하게 손질한 머리가 엉망으로 엉클어진 것 같아서 오늘 저녁나절에도 전지가위로 손을 보고 들어왔다. 가지 부러진 불두화는 내방으로 옮겨와서 화병에 담아 두었더니 연분홍 연등과 잘 어울린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불쑥 꽃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자비심을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매사의 작은 눈길에도 자비심이 결여돼 있다면 부처님 오신 뜻을 등지고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교리 공부를 할 때는 부처님은 도솔천에서 하강(下降)하셨다고 배우지만 엄격히 따지면 자비심에서 오셨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열반경 범행품에 ‘모든 보살과 여래는 자비심이 근본이다’는 표현이 있다. 따라서 부처님은 그 어디에서 오신 것이 아니라 자비심에서 탄생하셨다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명확한 의미는 자비심을 실천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무방하다.

새삼 이 시점에서 우리가 왜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하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일상에서 자비심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라는 뜻이기도 하다. 불교의 목표는 개인적으로 지혜를 완성하는 일이지만, 그 지혜는 자비심으로 실현될 때 수행의 완성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종교든 지혜만 있고 자비심이 없다면 날개 잃은 불구자 신세나 다름없다.

인생의 키워드가 되고 있는 성불(成佛), 행복, 평화, 건강, 출세 등 이러한 목표와 소원들이 모두 중요하지만 이것은 자비심이 근원이 될 때 생의 보람과 의미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자비심이 근본이 되지 않으면 우리가 추구하는 물질은 더 이상 행복의 요소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는 의미다.

지금은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살고 있는 물질적 풍요 속에 있지만,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보다 더 불행한 것인지를 살펴봐야 된다. 경제학자 로널드 잉글하트 교수는 개인 소득이 1만5000달러 이상이 되면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지수가 더 이상 상승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와 같이 물질의 충족이 보상해 주는 행복의 한계는 분명한 것이다.

사월초파일이 다가올 때마다 빈자일등(貧者一燈)의 가르침을 다시 해석해볼 필요가 있다. 이 일화를 일찍이 경전에 소개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따져 물을 것도 없이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욕심 없는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 삶은 이미 욕심으로 가득 차 있어서 가난해질 수 없는 인생은 아닌지 살펴보라는 뜻이다. 따라서 만족하지 못하는 욕망의 삶이 행복을 방해하는 원인이라는 것을 연등 불빛 아래서 새롭게 배워야 한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 ‘왜 행복하지 못한가?’를 질문하고 그 대답을 부처님 오신 뜻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자비심과 만족이 없는 삶은 우리를 불행으로 이끄는 요인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소욕지족의 가르침은 이 시대에 더 유효한 법어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나라 때의 걸출한 스승이었던 향엄 선사는 “어제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다. 금년의 가난이 진짜 가난이다”라는 법어를 남겼다. 여기에서 재물이 부족하여 가난한 것은 가짜 가난이고 진짜 가난은 마음이 가난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은 어제보다 더 가난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번 사월초파일은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더더욱 가난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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