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승철 변호사(전 서울지방변호사회장)
얼마 전 양승태 대법원장은 신임법관 임명식에서 우리 헌법이 법관을 선거로 선출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다수의 전횡으로부터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말이야 맞는 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대법원이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섰던 적이 과연 언제였던가?
필자의 기억에 대법원은 국민적 관심이 쏠린 사건들에서 번번이 대기업 등 소수의 기득권에 관대한 태도를 보여 왔다. 직원 2646명을 정리해고 한 쌍용차 사건에서 대법원은 정리해고가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정리해고가 무효라고 했던 2심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많은 국민들의 관심을 모았던 통상임금 소송에서 신의칙이라는 애매한 법리를 근거로 근로자들에게 수당을 지급하지 않을 수 있는 논리를 만든 것도 대법원이었다. 심지어 대법원은 구조조정이나 합병은 노동쟁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판시한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우선은 그 기업에 소속된 근로자들의 노동3권이 제한되는 것은 사실이나 이는 과도기적인 현상에 불과하고, 기업이 경쟁력을 회복하고 투자가 일어나면 더 많은 고용이 창출되고 근로자의 지위가 향상될 수 있으므로 거시적으로 보면 이러한 해석이 오히려 전체 근로자들에게 이익이 되고 국가경제를 발전시키는 길이 된다.” 노동3권은 근로자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대법원은 노동3권을 제한하면 근로자의 지위가 향상될 수 있다는 모순된 논리를 펼치고 있다. 대법원의 이러한 판결에 대해 ‘다수의 전횡으로부터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수많은 중소기업을 줄도산의 위기로 몰아넣은 키코 사건에서도 대법원은 역시 대형은행들의 손을 들어줬다. 대한민국의 대법원은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소수의 기득권’을 보호해 왔다는 비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대법원 판결은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대법관에 대해서는 임명부터 임기를 마치는 날까지 국민의 직접적인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다. 대법원은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민주적 정당성은 매우 취약하다. 현행 헌법의 문제점이다. 대법관이 아무리 편향되고 독선적이라고 하더라도 헌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국민들이 대법관에 민주적 통제를 가할 방법은 전혀 없다. 다행히도 최근 헌법 개정 논의가 활발하다. 따라서 대통령 선거 이후 헌법이 개정되면, 대법관에 대해 국민이 직접 정치적 책임을 묻는 제도가 도입되어야 한다. 일본만 하더라도 최고재판소 재판관에 대해 ‘국민심사제’를 실시하고 있다. 일본의 최고재판소 재판관은 임명 후 처음으로 행해지는 중의원 총선거에서 국민으로부터 가부(可否) 판단을 받는다. 그리고 그 후 10년이 지나면 다시 중의원 총선거에서 직접선거로 심사를 받는다. 최고재판소 재판관들로 하여금 재판을 할 때 국민의 뜻을 살피라는 것이다.
개헌을 하게 되면 반드시 ‘대법관 국민심사제’가 도입되어야 한다. 그래서 대법관들도 임명 후 정기적으로 선거를 통해 국민들의 판단을 받고, 민주적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대신 대법관의 6년 임기제를 없애고, 정년제를 도입하여 대법관의 신분을 충분히 보장해 줘야 한다. 이렇게 되면 국민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대법관은 오랫동안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고, 문제가 많은 대법관은 조기에 탈락될 것이다. 또한 대통령이 아무리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대법관에 임명하더라도 국민이 사후적으로 충분히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대법관 국민심사제’의 도입으로 국민 위에 군림했던 사법권력이 국민의 손에 돌아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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