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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추적논픽션 비선권력] <10화> 박근혜 앞세운 구국선교단의 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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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영애 앞세운 구국선교단의 돌진

최태민은 박근혜를 만난 뒤 잘나가던 신흥종교 ‘영세교’의 간판을 서둘러 내린다. 즉 최태민은 박근혜를 만난 지 1개월 뒤인 4월10일 영세교의 간판을 내리고 ‘대한구국선교단’을 창립했다. 그는 4월29일 스스로 대한구국선교단 총재가 돼 1978년 2월 박근혜가 총재를 맡기 전까지 구국선교단을 이끌었다. 중앙정보부는 이와 관련, “박근혜의 후원으로 자신의 심복 및 사이비 종교인 중심으로 대한구국선교단을 설립하고 총재로 취임”했다고 분석했다(중앙정보부, 1979. 10. 23, 4쪽 참고).

최태민은 이 즈음 ‘최태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4, 5월쯤 기독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최태민의 증언이다. “1975년 1월 종합총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 5월 대한예수교 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었어요. 이렇게 얘기하면 내가 속한 신학교와 교단이 사이비라고 몰아칠텐데….”(유인종, 1990. 12a, 255쪽)

하지만 일각에서는 최태민이 돈을 주고 대한예수교장로회종합총회 조현종 목사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백상현, 2016. 11. 21; 윤석진, 1993. 11, 211쪽; 탁명환, 1988. 5, 148쪽 참고). 조현종 목사는 일본대학을 졸업한 뒤 경찰 간부를 거쳐 1970년 종합총회 2대 총회장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조현종은 1개월 뒤인 6월21일 서울 배재고에서 열린 대한구국선교단 산하 구국십자군 창군식의 사회를 보기도 했다.

세계일보

1975년 9월5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구국선교단 및 의사협회 간부들을 초청해 행사를 열었다. 이날 박 대통령이 최태민 당시 구국선교단 총재와 악수를 하고 있다. 그 사이에 흰색 원피스를 입은 당시 퍼스트레이디 박근혜가 서 있다. 국가기록원


최태민은 대한구국선교단을 창립한 이후 보수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급속히 영향력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최태민은 5월4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중앙교회에서 열린 대한구국선교단 주최의 구국기도회를 연 뒤 5월11일 오후 5시 경기도 파주 ‘자유의 다리’ 앞 임진각 광장에서 박근혜가 참석한 가운데 목사와 신도 5000여명이 참여한 대규모 구국기도대회를 열었다(『경향신문』, 1975. 5. 12, 7면; 『동아일보』, 1975. 5. 12, 7면 참고).

대한구국선교단은 대통령의 ‘영애’ 박근혜가 참여하면서 중요한 조직으로 급부상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최태민의 영향력은 급상승했다. 최태민은 5월 대한구국선교단 사무실을 서울 서대문구 합동 111번지 대왕빌딩 609호로 이전했다. 구국선교단의 내부 조직도 정비해 총재 최태민을 중심으로 부총재 3명(허모 부흥사, 강모 부흥사, 강모 여사)과 단장(박모 목사), 부단장(원모 목사) 사무총장(김모 목사) 등으로 지도부를 구성했다. 집행부에는 사무총장 산하에 총무·조직·선교·섭외·훈련·교육부장과 함께 기획실장(임모), 비서실장 (임모) 등으로 짜여줬다. 최태민의 의붓아들 조순제도 홍보실장으로 참여했다(『동아일보』, 1975. 5. 22, 5면; 탁명환, 1988. 4, 124쪽 참고).

최태민은 대한구국선교단을 문어발식으로 확장해갔다. 산하 조직을 세우거나 부설 조직을 창립하는 방식이었다. 최태민은 우선 6월21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배재고에서 창군식을 갖고 대한구국선교단 산하의 ‘대한구국십자군’을 창군했다. 창설 취지문의 일부이다. “어제의 이웃이었던 크메르와 베트남이 어이없게도 붉은 세력에 먹혀버린 참담한 양상이 오늘의 현실이며, 가만히 앉아서 구국이니 멸공이니 하는 말이나 생각만으로 이 위기를 넘길 수 없고,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사회의 부조리로 인한 정신적 해이는 북괴침략의 앞잡이가 되는 것으로 확신해 구국십자군을 창설한다.”(윤석진, 1993. 11, 200쪽)

구국십자단은 반공을 기치로 군사조직 형태를 갖춤으로써 조직의 확산을 겨냥한 것으로 분석된다. 최태민은 구국십자군의 창립 목적으로 ▲승공을 위해 전국 복음화 운동 앞장 ▲조국통일의 성업에 앞장서고 북한이 수복된 후 사회질서 정화 앞장 ▲사회 부조리 정화운동 앞장 ▲구국대열 앞장 등을 제시했다(문갑식, 2016. 12, 187쪽 참고). 최태민은 이를 위해 구국십자군 창군식을 전후해 소속 목사나 신도들에게 군부대 등에서 군사훈련을 받도록 했다. 예를 들면 5월22일부터 24일까지 목사 100여명이 3일간 5019부대 등에서 군사훈련을 받기도 했다(『경향신문』, 1975. 5. 26, 7면; 송창섭, 2016. 11. 8, 26쪽 참고).

최태민은 부설 조국통일문제연구원도 세웠다. 그는 10월30일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구 서울신학대학에서 대한구국선교단 부설 조국통일문제연구원을 창립총회를 갖고 활동에 들어갔다(『경향신문』, 1975. 10. 31, 5면; 『동아일보』, 1975. 10. 31, 5면 참고).

최태민과 대한구국선교단은 8월2일 경기도 양주군 구리읍 인창국민학교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무료진료 사업을 벌였다. 최태민은 이때 무료진료 사업의 가능성을 보고 9월2일 서울 장충동 영빈관에서 서울시의사회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박근혜는 자매결연식에 참석해 격려사를 낭독했다. 대한구국선교단은 12월10일 구 서울신학대학 건물에 개원식을 하고 무료 야간진료센터를 열었다. 이날 개원식에는 박근혜와 고재필 보사부장관, 김용태 공화당 원내총무 등이 참석했다. 무료 야간진료센터는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병리검사실 등을 갖추고 매일 저녁 7시 이후 야간진료를 했다. 의사들과 의대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경향신문』, 1975. 7. 30, 5면; 『동아일보』, 1975. 12. 10, 7면; 박근혜, 2007, 118쪽 참고).

최태민과 대한구국선교단은 멸공이나 국민총화 앞장 등 보수적인 정치 주장을 펼쳐 눈총을 받기도 했다. 대한구국선교단은 8월9일 광복 30주년을 맞아 특별 성명을 냈다.

“대한구국선교단은 (8월)9일 광복 30주년을 맞아 기독교인이 복지사회건설과 국민총화를 해치는 모든 요소를 뿌리뽑는 데 앞장설 것 등을 촉구하는 4개 항의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4개 항의 결의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대한구국선교단은 멸공만이 구국의 길임을 다시 천명하며 멸공의 제일선에서 투쟁할 것을 결의한다. ②조국의 평화통일은 대한민국의 유엔가입으로부터 이뤄져야 하며 유엔은 우리 국민과 정부의 결의를 조속히 수락해줄 것을 기원하는 기도를 계속한다. ③밝은 국가사회 건설을 위해 사회 정화의 첨병이 될 것을 결의한다. ④모든 기독교인은 복지사회 건설을 위해 헌신할 것과 더불어 국민총화를 해치는 모든 요소를 뿌리 뽑는데 앞장설 것을 촉구한다.”(『경향신문』, 1975. 8. 11, 5면)

세계일보

1976년 2월12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대한국국선교단이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에서 운영하던 무료야간진료센터를 방문해 당시 퍼스트레이디 대행 박근혜, 최태민 구국선교단 총재 등과 함께 병원을 둘러보고 있다. 국가기록원


대한구국선교단은 8월27일 오후 방한 중이던 제임스 슐레진저(James Schlesinger) 미국 국방장관에게 “한국은 아시아의 승공 보루”라며 공산위협에 대처하고 있는 한국의 지원을 건의하기도 했다. 슐레진저는 8월26일과 27일 이틀간 서울에서 열린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 참석해 박정희 정권의 핵무기 개발계획의 포기를 설득하려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조갑제, 2006-12, 40-42쪽; 『경향신문』, 1975. 8. 28, 7면 참고).

이와 관련, 전기영 예장종합총회장 목사는 최태민이 주도해 설립한 대한구국선교단은 기독교 진보세력에 대응하고 견제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2년 유신에 따른 사회적 반발이 커져가고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하자 위기감을 느꼈다는 것이다(이승규, 2016. 10. 29; 최우석 김정현, 2016. 12, 237쪽 참고). 종교연구가 탁명환도 구국십자군 창설은 “한국 기독교가 남침 위협을 내세운 독재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중대한 전환점”이라고 통탄했다(탁명환, 1988. 5, 144쪽 참고).

최태민은 박근혜 일가에 대해 노골적인 충성 분위기를 유도하기도 했다. 8월14일 오전 9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열린 육영수 여사 1주기 추모예배에 대한구국선교단 회원 800여명이 참여, 육영수를 애도했다(『동아일보』, 1975. 8. 14, 7면 참고).

최태민이 박근혜를 앞세워 구국선교단을 운영하면서 그의 송년 소감이 언론에 실리는 등 영향력이 크게 커졌다. ‘비선 실세’가 된 것이다. 최태민의 송년 소감이다. “인지(印支) 사태를 계기로 더욱 절실해진 국방력 강화를 위해 우리 기독교인들이 생명을 바칠 각오로 구국십자군을 창설한 것, 이와 더불어 기독교인들이 더욱 단합하게 된 것,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의 한 방법으로 야간무료진료센터를 개설한 것들이 뜻깊은 일이다.”(조갑제, 2006-12, 65쪽 재인용)

비선권력기록팀=김용출·이천종·조병욱·박영준 기자 brightw@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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