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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김기자의 현장+] 도시재생의 벽화마을, '갈등·대립·분열'…"이제는 지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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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답게 살고 싶다. 조용히 해 주세요' / 재생사업반대 / 주민들 재산권 침해 / 지구단위계획 전면 반대 / '주거지에 관광지가 웬 말이냐! 주민들도 편히 쉬고 싶다' / 흉측한 붉은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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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19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 이화벽화마을의 한 벽면에 '조용. 조용히' 구호가 붉은 글씨로 쓰여져 있다. (오른쪽) 20일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행궁벽화마을에 벽화가 붉은 페인트로 훼손돼 있다.


‘벽화는 훼손된 채 붉은 글씨만 가득’, ‘덧칠된 붉은 페인트,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

벽화마을. 지친 시간도 잠심 쉬어 가는 곳. 빠름과 디지털에 익숙한 도시인들에게 아날로그 감성을 느낄 수 있고 잠시나마 힐링(Healing)의 공간이다. 전국 곳곳 벽화마을은 한때 철거를 앞두고 있었지만 젊은 예술가들의 재능과 열정으로 눈이 즐겁고 가슴이 따듯한 마을로 변신했다. 포근한 그림에서 느껴지든 젊은 열정이 가득히 벽화에 담겨 이제는 그 지역의 대표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산동네였던 이화벽화마을. 젊음의 거리 대학로와 밀접한 지역에 있으면서도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 10년 전부터 벽화와 그림 계단 등을 조성해 관광명소로 탈바꿈했다. 도시 속 한국의 정서를 느끼고 싶은 외국 관광객이 걷고 싶은 마을로 알려져 있었다.

예능프로그램인 1박 2일에서 이승기가 천사 날개 벽화 앞에서 찍는 모습이 전파를 탔다. 방송을 본 외부인들이 사진이 찍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입소문까지 나면서 폭발적인 유동인구 증가로 이어졌다. 유동인구가 늘어나면서 고질적인 문제인 소음과 쓰레기가 뒤따랐다. 무분별한 사진 촬영으로 사생활까지 침해당해 조용하던 마을 주민들이 여기저기에서 불만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지난 19일 찾은 이화벽화마을은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따듯한 봄 날씨에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외국 관광객과 화보를 촬영 중인 일본인만 눈에 띌 뿐 고요함이 흐르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이화마을의 현 모습을 보는 듯했다.

이화마을의 상징인 꽃 계단과 물고기 가족 그림이 사라졌다. 도시재생 사업에 반대하는 일부 주민이 회색 페인트로 덧칠했다. 물고기 그림이 있던 계단 옆 벽에는 거칠고 흉측한 붉은 글씨로 ‘제발 조용히. 조용. 조용히’ 뒤덮고 있었다. 붉은 글씨를 본 관광객은 설명을 듣고 씁쓸한 미소로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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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 이화벽화마을의 한 벽면에 '사람답게 살고싶다. 주민들도 편히 쉬고 싶다. 조용히 해주세요 재생사업반대' 구호가 붉은 글씨로 쓰여져 있다.


지자체가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사이 주민들 간 대립과 갈등만 증폭됐다. 벽화가 마을을 갈라놓았다. 벽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하나하나가 포근하면서도 정겨운 벽화가 이제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오랫동안 마을에서 함께 생활한 주민 간의 대화는 사라지고 소통은 단절된 채 진통을 겪고 있다.

“살아 움직일 듯한 큰 잉어가 없어졌어요.” 활기가 넘치던 벽화마을이 그림이 사라지듯 그 명성도 사라져가고 있다. 연인과 함께 대학로를 찾으면서 벽화마을 길을 걷는다는 김 모(25) 씨는 “붉은 글씨가 보기 싫죠. 왠지 철거되는 집 같고, 계단을 걸을 때마다 느꼈던 정겹고 포근함도 없어졌죠.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벽화는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다.

벽화를 훼손한 주민들은 공동재물손괴 혐의가 적용돼 총 2,100만 원의 벌금형을 내렸다. “서울시와 관할 종로구청에 민원을 제기했지만, 조치가 없었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사건 이후 1년이 지났지만 사라진 벽화를 복원하자는 주민들과 이를 반대하는 주민들이 두 갈래로 나뉘어 아직도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상처와 분열과 갈등은 시간이 지난 만큼 깊어지고 봉합되지 않고 있다.

“마을 어른 신들은 있는 그대로 살고 싶어 하죠. 시끄럽다고 하는 것은 핑계고 주말 낮에만 좀 시끄럽지만, 저녁에는 조용한 편입니다. 벽화 때문에 마을이 많이 좋아졌죠. 마을이 활성화되고 집값도 오르고 작년 4월 벽화를 지우고 나서 주춤해졌죠.”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주민 얘기다.

정겹던 이화벽화마을. 마을 주민들이 옹기종기 경로당 마루에 앉아 따사로운 봄볕을 쬐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모습은 이제는 추억 속 동네가 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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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행궁벽화마을에 벽화가 붉은 페인트로 훼손돼 있다.


20일 경기도 수원시 행궁동 ‘벽화마을’을 찾았다. 평화롭던 마을. 붉은 페인트가 골목길을 뒤덮었다. 덧칠된 흉측한 붉은 페인트. ‘행궁동 벽화마을’의 현실이다. 마을을 상징하는 벽화의 상당 부분 붉은 페인트 덧칠된 채 방치돼 있다. 애초 마을 만들기 사업의 목적으로 주민들의 동의를 받아 미술작가들이 집집이 담장에 벽화를 그렸다. 택배 배달원만 눈에 띌 뿐 찾는 이가 사라진 골목길은 삭막한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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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행궁벽화마을에 곳곳에 쓰레기들이 방치돼 있다.


담벼락을 따라 그려진 아름답고 포근한 벽화로 많은 사람이 찾던 이곳은 붉은 페인트로 그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이번 일로 많은 벽화가 망가진 상태다.

‘벽화, 왜?’ 마을 주민들이 붉은 페인트로 덧칠했다. 주민들은 수원시에서 주택 10채를 선정해 문화시설로 지정·보존하겠다고 발표 후 분노했다. 사전 논의도 없이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문화시설로 지정되면 재건축 등 개발 행위가 제한받아 재산권 행사에 침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항의 차원에서 벽화를 훼손한 것. 훼손된 벽화 중에서는 유명 작가의 작품도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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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행궁벽화마을에 벽화가 붉은 페인트로 훼손돼 있다.


행궁동 벽화마을을 찾은 진 모 씨(60·남)는 “예전 그 모습으로 보존됐으면 좋겠습니다. 가슴이 현실이죠.” 이어 작가 김 모 씨(30·여)는 “벽화를 그린 분 애정을 갖고 그렸을 텐데…. 폭력적인 분위기가 드네요.”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통영 동피랑 벽화부터 시작한 벽화마을, 서울 이화동과 수원 행궁동까지 명소가 되는 것에는 성공했다.

붉은마을로 변해버린 벽화마을. 세상을 떠난 브라질 출신 작가 라켈 셈브리. 그의 유작인 금보여인숙 물고기 벽화가 회색 페인트로 덧칠됐다. 회색 페인트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져 본다.

‘행복한 동네라는 답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마을을 기억할까?’ ‘붉은마을, 벽화마을?’ ‘그날이 다시 올까?’

글·사진=김경호 기자 stillcu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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