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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피플&스토리] 100만원의 생존, 1000억원 ‘빛의 왕국’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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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에서 놀이, 놀이에서 ‘멋진 삶’의 방식으로…노시청

전(前) 필룩스 회장이 평생을 통해 부른 한 판 ‘사업가(歌)’

[헤럴드경제=이슬기 기자] 살아남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만 13살이 되던 해였다. 적토마 같던 아버지의 몸이 술에 젖어 무너졌다. 위를 모두 잘라낸 아버지는 죽음을 그림자 삼아 살았다. “나는 얼마 못 산다. 네가 가정을 이끌어야 한다”. 3년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버지가 불쑥 100만원(현재가치기준)을 건넸다. “가족의 내일을 이 돈으로 열어보라”는 말은 쇳덩이처럼 무거웠다.

노시청 전(前) 필룩스 회장(66ㆍ사진)은 그래서 ‘소년 사업가’가 됐다. 생존의 절박함은 나이를 구분해 다가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100만원을 어떻게든 무너뜨리지 않고 키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곧 삶의 씨앗이 될 테니까. 새벽이면 신문을 잔뜩 사다가 거리를 다니며 어른들에게 팔았다”. 승부사의 기질은 새벽 골목 안개처럼 절로 몸에 스며들었다. 사업이 ‘운명’이라 생각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국내 전자전기 소재부품 국산화의 신화이자 ‘감성조명 필룩스’ 창업자로서의 50년사(史)는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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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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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방식이었던 사업, 놀이가 되다=무겁고 절박하기만 했던 노 전(前) 회장의 사업이 첫 번째 전환기를 맞이한 것은 연세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한 1970년이다. 노 전(前) 회장은 합격자 발표를 듣자마자 학교 앞에 탁구장 자리를 물색했다. 아버지의 100만원은 중ㆍ고등학교 시절 신문팔이와 아르바이트를 거치며 훌쩍 불어난 터였다. “대학생은 신변이 자유로우니 진짜 사업, 장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등록금이며 생활비를 충당하려면 신문팔이보다 큰 수익원이 필요하기도 했고”. 가장 넓은 사무실을 빌려 탁구대 12대를 동시에 들였다. ‘왕자탁구장’이라는 간판도 달고, 명함도 만들었다. 주변에서는 “될까?”했지만, 그는 “된다!”했다.

구르고 깨졌던 어린 시절 기억이 ‘성공의 해법’을 보여줬다. 모래내 정구화(테니스화) 공장을 찾아 밑창이 터진 불량품 두 가마니를 싸게 얻어왔다. 다듬고 짝을 맞춰 손님이 올 때마다 이름을 써서 줬다. 개인 신발장도 만들었다. ‘내 것’이 생긴 손님들은 왕자탁구장으로만 밀려들었다. 탁구를 유독 잘 치는 이들에게는 ‘평생 무료쿠폰’을 나눠줬다. 뛰고 나는 탁구 ‘꾼’들이 모여드니, 구경꾼으로 왔다가 탁구채를 잡는 이들도 덩달아 늘었다. 겁도 없이 탁구 세계 챔피언 이에리사 씨를 초청해 전국대회도 열었다.

“학교와 탁구장을 오가며 당시 돈으로 매일 3만원씩을 저금했다. 그 돈으로 가난한 학우들 밥도 먹여주고, 잠도 재워주고 했지. 많은 사람과 만나고 소통하고…. 사업은 정말 즐거운 ‘놀이’ 같다는 것, 콘텐츠만 있으면 무엇을 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생존의 수단이었던 사업이 즐거워졌다. 즐거움과 고난을 동시에 아는 청년은 무서울 것이 없는 호랑이가 됐다.

▶승부사의 국내 첫 ‘1인 연구소’, 질곡 끝에 1000억 ‘빛의 왕국’으로=연매출 1000억원대 조명기업 필룩스의 뿌리는 1975년 설립된 ‘보암전기전자연구소’다. 노 전(前) 회장은 장교 복무 마무리를 한 달 앞둔 1975년 6월 20일 이 연구소를 설립했다. 아버지의 100만원이, 왕자탁구장의 수익금이 뿌리가 됐다. 군은 노 전(前) 회장에게 청와대 경호 사무관으로 ‘말뚝’ 박을 것을 강요했다. 전기전자 소재 연구에 목이 말랐던 노 전(前) 회장은 망설이지 않았다. 서울에 올라와 덜컥 사업자 등록을 내고 전역했다. 함께할 직원도, 변변한 시설도 없었다. 혼자 세탁기를 분해해 ‘원심분리기’를 만들고, 전기 프라이팬으로 ‘그린시트’(반도체 웨이퍼 생산의 필수 공정)를 제조했다.

“일본 전기전자 연구 학회지를 모두 모아 씨름하고, 가정용 전자기기로 연구시설을 만들었다. 사무실에서 혼자 그런 짓을 계속했다. 돌이켜 보면 없어서 궁했는데, 그래서 더 많은 공부를 하게 됐다. 안 될 것 같아도 되는 게 젊음이더라,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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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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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까지 3년동안 변변한 수익은 없었지만, 그 자체가 즐거웠다. 놀이 같은 연구 속에서 최초의 국산 ‘페라이트 코어’(변압ㆍ유도 핵심부품)와 ‘고주파 인덕터’(전기회로 핵심부품)가 탄생했다. 흑백 진공관 TV를 처음 만든 동남전기에서 납품 요청이 들어왔다. 길이 열리는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납품 시작 6개월 만에 동남전기에 부도 딱지가 붙었다. 승부사 기질이 다시 발동했다. 박영택 당시 동남전기 회장을 찾아가 “이제 시작인 젊은이의 삶을 이대로 날리겠느냐”고 외쳤다. 담배가 손끝을 태울 때까지 침묵하던 박 회장이 “오늘 밤 화물차 두 대를 창고 앞에 대라”고 답했다. 재고 압류가 시작되기 전 상품을 몰래 빼주겠다는 호의였다.

노 전(前) 회장은 연구소장에서 외판원이 됐다. 신문을 팔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절망하지는 않았다. 동남전기에서 받아온 ‘뮤직센터’(레코드ㆍ카세트ㆍ라디오 융합제품)를 전국을 돌며 팔았다. 재기의 발판이 생겼다. 노 전(前) 회장은 이후 삼성전자 오디오 사업부에 부품을 납품하며 협성회(삼성전자 협력사 모임) 유일 ‘20대 사장’이 되는 등 승승장구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1984년에는 사명을 보암산업으로 바꿨고 과감히 대기업 납품업체의 굴레에서 독립했다. 1993년에는 국내 최초로 중국에 진출했고 1997년 코스닥에 상장했다. 2000년에는 사명을 필룩스로 바꾸고 글로벌 조명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 사이 그가 낸 특허만 1000여개에 달한다.

“모두가 삼성전자 협력업체에서 독립하는 것을 말렸지만 ‘이러려고 사업을 시작한 것이 아닌데’ 하는 심언(心言)이 줄곧 마음을 괴롭혔다.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들과 나의 기술과 감성, 철학, 사랑을 담은 제품으로 소통하고 싶었다. 고민을 거듭하다 기존 소재부품 사업과 기술기반을 공유하는 전자식 조명 시장에 뛰어들었다”. 필룩스는 현재 문화적 감성을 담은 조명으로 인정받으며 루이뷔통 등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매장과 조형물을 비추고 있다. 지난해 매출액은 1077억원에 이른다. 빛의 왕국을 이룬 셈이다.

▶평생을 바친 사업, 이제 ‘멋진 마무리’를 위한 철학의 도구로=평생을 사업에 바쳐온 노 전(前) 회장은 이제 ‘사업을 통한 멋진 삶의 마무리’를 꿈꾼다. 지난해 초 자신이 가진 필룩스 지분 30% 다른 기업에 매각하고 융합ㆍ전문경영의 틀을 만든 것이 대표적인 예다. “아무리 자식이라 해도 고생도 해보지 않고, 회사의 기반이나 위험 요소도 모르고, 직원과 소통하는 법도 모르는 이에게 회사를 물려줄 수는 없다”는 철학이 반영됐다. 필룩스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끄는 동시에, 임직원의 삶을 보장하기 위한 결단이다.

자신의 사업 경험을 전수하기 위해서는 청년 창업가를 대상으로 한 멘토링에 열심이다. 국내 최고의 디지털 마케팅 대행사로 평가받는 ‘이노레드’의 박현우 대표, 최근 영어교육 시장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시원스쿨’의 이시원 대표 등이 그에게 조언을 받고 성장한 ‘멘티’들이다.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세상은 ‘창업을 하라’고 젊은이들을 떠미는데 그들이 ‘어떻게 길을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사람은 없다. 이제 (필룩스 지분 정리로) 몸이 가벼워졌으니, 여생은 그런 사업에 바칠 생각이다”. 생존에서 놀이로, 놀이에서 삶으로 평생 사업을 일궈온 노병(老兵)의 눈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yesye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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