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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 (금)

[노명우의 인물조각보]미혼도 비혼도 아닌 그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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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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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언수행’ 하기 위한 침묵에선 힘이 느껴진다. 그런데 사실상 강제된 침묵이라면 사정이 영 다르다. 이 경우의 침묵에선 ‘아리다’에 가까운 정서가 묻어난다. 통계청에 따르면 대한민국 여성의 평균 초혼연령은 30.0세이고 남성은 32.6세이다. 2015년 30만2800쌍이 혼인이라는 삶의 결정을 내렸고 새로운 삶의 과정으로 옮아갔다. 어떤 사람은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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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변했다. 예전과 달리 혼인은 개인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통념이 되어가고 있다. 결혼이 필수라는 주장, 결혼적령기가 있다는 관념 또한 점차 설득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그렇기에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미혼(未婚)은 분명 문제적 단어이다. 성인이 되었음에도 결혼하지 않았다면 비정상이라는 낙인이 미혼이라는 단어에 일종의 주홍글씨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주홍글씨를 지우기 위해, 결혼하지 않음을 선택한 행동을 지칭하는 비혼(非婚)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분명 진일보이다. 페터 비에리의 말을 잠시 옮겨본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기를 원합니다. 누구라도 열렬하게 공감할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요. 바로 존엄성, 그리고 행복입니다.” 비혼을 자기결정한 사람이라면, 결혼하지 않았기에 불행하기는커녕 오히려 행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미혼이 비정상이라고 낙인찍는 행동을 비혼이라는 단어로 방어할 때,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 결혼하지 않음을 선택한 적 없는데, 결혼하지 않은 경우이다.

미혼, 비혼 혹은 만혼 등 통계적으로는 동일하게 취급되는 사람들 각각의 속사정은 다르다. 자기 의지에 따른 비혼은 강화된 자기결정성을 단어 속에 포함하고 있지만, 자신 있게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고요?”라고 외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어색하게 침묵하고 있는 33세의 남자사람을 만났고, 그의 사정을 경청했다. 통계상으로 그저 결혼하지 않은 사람으로만 분류되는 그 사람은 건조한 통계치에 이야기를 입혀주었다.

이 남자의(his) 이야기(story)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청춘들의 짧은 인생 역사(History)이기도 하다. 이 남자는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 왔다. 대학교 근처에 부모님의 도움으로 보증금 500만원에 월 50만원짜리 방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2005년의 일이다. 대학을 다니다 군대를 다녀왔고, 제대 후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려고 노량진으로 거처를 옮겼다. 정작 대학에 진학했을 때 선택한 전공에서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에 전공 관련 학점이 뛰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적성에 맞지 않는 전공 분야로 진출할 생각도 없었고 학점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9급 공무원 시험을 마지막 탈출구로 여겼던 그 남자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다. 2005년에 입학한 대학을 2014년에야 졸업했고,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대표 마트에 ‘전문직’으로 취업했다.

말의 유희에 속으면 안된다. 이 ‘전문직’은 일반적 의미의 전문직과 다르다. 이 사람의 직장 세계에선 승진이 불가능한 무기계약직, 즉 ‘중규직’을 ‘전문직’이라 부른다. 이 사람은 주당 40시간을 근무하고 세전 월 140만원의 급여를 받는데, 월세 50만원과 통신비를 포함한 각종 공과금으로 10만원을 지출하고 남는 70여만원의 돈으로 생활비와 월 20만원 상당의 저축을 하고 있다. 이 사회가 그에게 허락한 일자리는 연애, 결혼과 출산을 상상할 경제적 여유를 제공하지 않는다.

3포 세대라는 표현에 동의하냐고 물었을 때, ‘포기’는 그래도 일종의 선택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처지는 3포가 아니라, 포기라는 선택지조차도 주어지지 않은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이 사람은 독신주의자도 아니고, 비혼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비록 ‘언젠가’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결혼하고 싶어했다. 어떤 사람을 배우자로 만났으면 좋겠냐고 물었을 때, 한참을 망설이다 ‘좋은 사람’이라고 막연히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냐고 묻자,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먼 곳을 바라봤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자신은 좋은 사람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서는 안되는 처지라는 자기검열이 작동하는 표정이었다. 10년 후의 모습을 질문하고 나서, 나는 적절하지 못한 질문임을 깨닫고 후회했고 그 사람은 10년 후 자기 미래를 막막해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한번뿐인 인생을 함부로 살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말 못할 속사정이 있다. 속사정을 모르는 채 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기는 쉽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 쉽게 참견한다. 어떤 삶에 대해 ‘미혼’이라 낙인찍고 ‘비혼’이라 방어하는 그 사이에서 자신이 ‘미혼’도 ‘비혼’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침묵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영화 제목이 떠오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타인을 ‘미혼’인지 ‘비혼’인지 쉽게 감별하는 분위기 속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는 그 사람은 그래도 끝까지 ‘한국이 싫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가 더 아리다.

<노명우 | 아주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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