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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 (화)

갖고 싶다, 권력의 논리를 흔드는 이런 여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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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미 정치의 속살 들춘 영화 <미스 슬로운>

제시카 채스테인, 냉혈 로비스트 역 맡아

영 변호사였던 페레라, 한국서 각본 집필



한겨레

<미스 슬로운>. 메인타이틀픽쳐스 제공


갖고 싶다, 이 사람. 29일 개봉하는 <미스 슬로운>에서 엘리자베스 슬로운(제시카 채스테인)은 이기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로비스트다. 그 결과 백전백승을 자랑하며 워싱턴 정가를 움직이는 인물이 됐다. 공화당의 강력한 첨병이었던 그가 총기 규제를 강화하는 ‘히턴-해리스’ 법안을 저지해달라는 거물 고객의 요청을 거부하고 몸담았던 보수적 로비 회사를 나와 총기 규제를 위해 싸워온 작은 회사의 캠페인에 합류했을 때 모두가 그의 진의를 의심했다. “넌 그저 이기고 싶은 거잖아? 더 큰 상대가 필요했지?” 슬로운의 대답은 이렇다. “신념있는 로비스트는 자신의 승리만 믿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신념을 가지고 오랫동안 활동해오던 사람들도 그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는 어제까지 같이 일했던 동료들에게 “이 바닥이 너희 내장을 도려내고 숨통을 조여대도 나한테 징징대지 마”라고 속삭인다. 이기기 위해 도청과 미행은 기본이고 가까운 사람들을 배신하고 그들의 사생활을 팔아서 총기규제법에 대한 여론을 바꾸는 그의 모습에 총기 규제 활동가들은 경악하고 화를 내며 그를 떠난다. 거기에 로비 법률 위반 혐의로 미 상원 청문회 조사까지 받게 된다. 그래도 승리를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길 멈추지 않는 슬로운의 모습은 마치 링 위에 혼자 선 고독한 권투선수를 보는 듯하다.

이 정치라는 경기엔 규칙도 한계도 없고 오직 승패만 있다. 관객들은 승자가 만들어낸 이야기만을 믿는다. ‘진보는 과정을 중시하고 보수는 결과만을 본다’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우리는 혹시 안전한 게임만을 기대했던 것은 아닐까? 도덕적으로 올바른 주장을 하는데 왜 사람들은 우리를 지지하지 않을까? 진보는 늘상 이러한 의문에 시달린다. 슬로운은 우리가 진짜로 이기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자신을 더럽혀서라도 치열하게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리 보전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쥐새끼들이 들끓는” 민주주의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지지하는 것의 단 한번의 승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던진다.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많은 경우 우리는 도덕적으로 의심스럽거나 위험한 수단을 택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작용이 수반될 가능성 또는 개연성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막스 베버의 말은 슬로운에게 딱 맞는 묘사다.

돈과 얄팍한 표심, 언론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따라 움직이는 정치체제의 속살을 파헤친 영화는 왜 변화가 이토록 어려운지를 보여주지만 그 결론은 정치적 허무주의가 아니라 희망론에 가깝다. 물론 진보의 신념을 믿는 이들 중 누구도 기꺼이 선한 이상과 현실적 수단의 결합이라는 과제를 미스 슬로운만큼 치열하게 밀고 나가지 않으리라는 딜레마는 남지만 말이다.

<제로 다크 서티>에서 고독한 시아이에이(CIA) 요원이었던 제시카 채스테인이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회심의 한 방을 준비하는 통찰력” 있고 냉혹한 로비스트를 맡았다. 각본을 쓴 조너선 페레라는 영국의 변호사로,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 위해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한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수없이 많은 대본을 읽고 <미스 슬로운> 각본을 썼다고 한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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