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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ISSUE INSIDE] 퍼펙트스톰 직면한 한국 경제-외환위기(1997년) 닮은 꼴…10년 주기설 현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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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에 ‘퍼펙트스톰’이 불어닥치고 있다. 다소 허황되게 들렸던 ‘10년 주기 위기설’이 현실화될 것이라는 우려감이 높다.

금융가에선 2017년 한국에 큰 위기가 닥칠 것이라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돌았다.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2008년 모기지 채권發 금융위기에 이어 10년 간격으로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10년 주기설을 주장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지난 10년간 전 세계 중앙은행은 경쟁적으로 돈을 풀었다. 꺼져가는 경제를 인위적으로라도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금리 인하, 양적완화 등 이름은 달라도 돈을 풀어내 억지로 인플레이션을 만들었다는 점은 같았다. 한국도 동참해 기준금리를 1.25%까지 끌어내리며 경제를 살리려 노력했다.

문제는 한국에서 가시적인 경제 회복 성과가 나오기도 전, 주요 국가에서 돈을 회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시장에 풀린 돈이 경기를 살리는 데 기여했지만 자산거품을 만들어내는 부작용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정책 변화가 미국 금리 인상이다. 미국은 인위적인 부양책으로 어느 정도 경기가 회복했다고 판단하고, 미국 대선이 끝나는 12월 금리를 올릴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금리를 올릴 만큼 경기가 살아나지 못했다. 게다가 최순실 게이트가 일파만파 확산하며 정치와 경제 리더십이 완전히 사라졌다. 자본시장에서 외국인과 기관투자자가 돈을 빼자 코스피는 2000선이 무너졌고 코스닥도 600선을 장담하기 어렵다.

매경이코노미

최근 한국 경제를 나타내는 통계치는 거의 전부 빨간불이 켜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성장률 하락, 신용 강등 기업과 한계기업 급증, 취업률 감소 등 여러 지표가 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게 가계부채다. 한국 경제의 뇌관으로 계속 지적받아온 ‘가계부채’는 외부의 눈으로 봐도 불안하기 짝이 없다. 한국은행 ‘통화신용정책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2분기(4~6월) 가계부채 위험정도를 나타내는 ‘가계 신용갭’은 2.03%포인트였다. 지난해 2분기 0.36%포인트에서 1년 새 약 6배 수준으로 급등했다.

가계 신용갭은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장기 추세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 측정한 것으로, 신용 리스크가 경제성장에 비해 적정하게 관리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신용갭이 2%포인트 미만이면 ‘보통’, 2~10%포인트면 ‘주의’, 10%포인트를 초과하면 ‘경보’ 등 3단계로 구분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한국 가계 신용갭은 2006년 4분기 주의 단계로 들어선 이후 줄곧 보통 수준을 유지해오다 9년 6개월 만인 올 2분기 다시 주의로 분류됐다.

IMF 외환위기 때만 해도 가계부문은 그래도 버틸만 했으나 현재는 이마저도 위태로운 지경이다.

2016년이 1997년과 판박이처럼 여겨지는 증거는 수두룩하다.

1997년 12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전 1990년대 중반부터 위기 징후가 있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8년 연속 10%대로 임금을 올렸다. 기술 개발과 혁신 노력은 부족해 기업은 고비용·저효율 구조에 빠졌다. 수출 경쟁력이 떨어지고 제조업 전반이 부진했지만 1994~1995년 반도체 호황으로 기초체력이 떨어졌다는 점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1996년부터 중견기업이 하나둘씩 떨어지더니 1997년 말 한보, 삼미, 진로, 기아, 해태, 뉴코아, 한라 등 굵직굵직한 대기업이 줄줄이 도산했다. 기아차는 당시 분식회계로 대규모 손실을 숨긴 가운데 재계 서열 8위로 올라섰으나 결국 곪은 상처가 터졌다. IMF 외환위기가 닥친 다음 해인 1998년과 1999년 재계 3위 대우그룹 등 더 많은 기업들이 쓰러졌다.

지금 상황도 다르지 않다. 2012년을 기점으로 산업 경쟁력이 급격히 떨어져 조선과 건설업체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STX의 부실과 함께 중견 조선업체들이 잇따라 쓰러졌고, 1960년대 경제개발 이후 처음으로 2014년과 2015년 2년 연속 제조업 매출이 줄었다.

대우조선해양 사태는 한국 경제위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부실회계로 점철된 대우조선해양은 경쟁력을 잃었고 수주가 끊기자 사실상 부도 상태나 다름없게 됐다. 지난해 4조2000억원을 지원받으며 경영 정상화를 모색했지만 완전자본잠식 상태다. 주식시장에서도 퇴출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대우조선해양뿐 아니라 국내 조선업이 아예 뿌리째 무너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해운업도 쪼그라들기는 마찬가지다. 세계 7위 한진해운은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현대상선의 미래도 장담하기 어렵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서울중앙지법 파산부가 관리한 법정관리 기업 자산 규모는 30조원이었다. 당시 약 1300여개 기업이 법정관리를 받아 법원이 재계 서열 5위라는 말도 나왔다.

지금은 그때와 아주 유사하다. 올 들어 7월까지 법정관리 신청 기업은 562개로 같은 기간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지난해 540개를 훌쩍 넘었다. 관리자산은 30조원에 가깝다. 현재 법정관리를 받고 있는 기업 숫자는 1150곳으로 사상 최대다. 법정관리 신청 기업이 조선, 해운, 건설 등에서 전자·통신, 유통·패션, 식음료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은 더욱 예사롭지 않다. 금융권에서는 향후 5년 내 법정관리 기업이 2000개까지 불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놨다.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지만 정부의 태도는 안일하기 짝이 없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0월 “현재 경제 상황은 IMF 외환위기 때와 다르다”며 “그때처럼 연쇄적으로 위기가 올 가능성은 낮다”고 밝혔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도 10월 26일 경제전문가들과의 경제 동향 간담회에서 “경제학에 ‘자기실현적 기대(self-fulfilling expectations)’라는 말이 의미하듯, 비관적 인식은 그 자체가 미래를 더 어렵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은이 낙관적인 경제 인식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한은이 내년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8%로 내놓은 이후 국정감사에서 기획재정위원들로부터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이라는 지적이 쏟아졌다. 이에 대해 이주열 총재는 “정책당국인 만큼 최악의 상황을 되도록 상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나빠질 경우는 대비하더라도 상황 호전에 대한 기대를 갖는 것은 괜찮다고 본다”며 말했다.

이 같은 발언에 대해 전문가들은 “1997년 외환위기 직전까지 근거 없는 낙관론으로 여유를 부렸던 정부 관료를 연상시킨다”며 우려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1997년 외환위기 때 경험했던 ‘파이어세일(fire sale)’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파이어세일이란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에 처한 기업이 헐값에 자산을 매각해야 하는 상황을 말한다. 파이어세일을 피하고 생존하려면 가계와 기업을 비롯한 민간 경제 주체가 각자 위험관리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한다. 가능한 한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확보하고, 비핵심 자산을 처분해 유동성을 마련하며, 불요불급한 소비와 투자를 줄이라는 설명이다.

성태윤 교수는 “소비, 제조 등 핵심 지표가 흔들리고 4분기 추가 하락이 우려돼 정책 대응 논의가 시급한데 정책당국 경제 인식이 안이하다”며 “정책당국의 적극적인 대응 의지가 없거나 능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민간 경제 주체들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대기업 임원은 “1997년 김영삼 대통령 아들 김현철이 전횡을 휘둘러 리더십 공백이 생긴 이후 경제위기가 왔다”며 “지금 최순실 사태를 보면 그때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는 것 같아 불안하다”고 말했다.

[명순영 기자 msy@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882호 (2016.11.08~11.1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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