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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9 (화)

예고된 위험, 조선· 해운··· 구조조정, 왜 하필 지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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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역량 급감으로 인한 조선·해운업의 장기 불황과 이에 따른 조선업의 수주절벽, 국내기업의 유례없는 대규모 적자는 이미 ‘예고된 위험’이었다. 그런데 구조조정은 왜 하필 ‘지금’일까.

“20대 총선 후, 19대 대선 전이기 때문”이란 것이 금융권의 중론이다.

4월 총선 이후 조선·해운 등 취약업종에 대한 구조조정이 급물살을 타고 있지만, 정치 일정에 밀려 기업 부실이 곪아터진 후에서야 메스를 들이댄 채권단과 정부 당국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4조5000억원의 천문학적인 자금 지원을 받은 STX조선해양이 채권단 공동관리(자율협약) 3년만에 결국 법정관리로 넘어가면서 국민 혈세만 쏟아붓고 기업회생에 실패한 국책은행에 비판의 화살이 쏠린다. 그러나 선거를 의식하며 부실 기업들이 한국경제의 시한폭탄으로 떠오를 때까지 ‘폭탄 돌리기’를 해온 정부 당국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수차례 ‘선제적 구조조정’을 강조하며 “구조조정 주체는 시장”이라고 하지만, STX조선의 사례에서 보듯 구조조정이 경제 논리가 아닌 정권의 판단에 따라 휘둘리며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채권단이 금융당국과 정치권의 압박에 밀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자금 지원을 하고, 결국 시간만 끌며 부실만 눈덩이처럼 키웠다는 지적이다.

30일 NH투자증권에 따르면 STX조선에 대한 금융권의 위험노출액(익스포저)은 총 7조원으로, 이중 6조3000억원이 산업은행 등 특수은행 몫이다. 이미 1조원 가까이 충당금을 쌓아뒀지만 추가 충당금 부담도 높은 상황이다. 산업은행에 따르면 STX조선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은행권이 안게 될 추가 손실만 2조원이 넘는다.

NH투자증권은 “2013년 STX조선과 팬오션의 처리 방안을 고민하던 채권단이 낮은 회생 가능성과 상대적으로 열위한 재무구조에도 불구하고 은행권과 지역경제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감안해 STX조선의 추가 지원을 결정했다”면서 “이는 원칙없는 구조조정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가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금융권에 따르면 2013년 4월 STX조선이 자율협약에 돌입하기 전 채권단 내부에서도 자율협약에 회의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당시 STX조선은 무리한 저가 수주 등으로 인해 1조5000억원 규모의 영업 손실을 기록하고 있었다. 조선업황의 악화로 수주절벽 역시 불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당시 시중은행을 중심으로 ‘회생 가능성이 없다’며 법정관리에 돌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산은과 금융당국은 “세계 수주잔량 5위인 조선사를 죽일 수 없다”며 채권단을 압박, 자율협약을 밀어붙였다. 당시는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한 직후였다. 이후 3년간 STX조선에 4조5000억원의 자금이 투입됐다.

STX조선의 법정관리가 결정되기 불과 5개월 전인 지난해 12월에도 산은은 실사 결과 “STX조선의 계속기업가치가 청산 가치보다 높다”며 자율협약을 유지키로 하고 4500억원의 추가 지원 계획을 밝혔다. 우리·KEB하나·신한은행 등 시중은행들이 이에 반대하며 채권단에서 빠져나갔지만 산은은 추가 지원을 강행했다. 당시는 총선을 4개월 앞둔 시점으로, STX조선을 수술대 위에 올렸을 때 지역사회의 반발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정부가 ‘정치적 결정’을 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이같은 결정은 청와대 경제수석과 경제부총리, 한국은행 총재, 금융위원장 등이 참여하는 청와대 서별관화의에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총선 후, 자율협약 유지를 결정한 지 5개월만에 분위기가 반전됐다. 채권단은 “이달 말 부도가 불가피하다”며 포기 선언을 했다. 5개월만에 법정관리에 들어갈 회사에 4500억원이란 혈세를 퍼부은 셈이 됐다.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묻지마 지원’도 비슷했다. 산은·수은 등 국책은행은 총선을 앞둔 지난 10월 4분기 연속으로 영업손실을 내고 있던 대우조선해양에 4조2000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 지원을 했다. 정작 10년 넘게 대우조선의 대주주로 있던 산은은 수조원대의 부실을 감춘 대우조선의 분식회계 의혹은 잡아내지 못했다. 금융권 일각에선 “대우조선이 제2의 STX조선이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업계에선 정치 일정에 따라 구조조정 플랜을 뒤바꾸는 정부와 정치권의 개입이 가장 큰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선거를 앞두고선 지역 표와 여론을 의식해 회생 가능성이 없는 기업에 국책은행을 앞세워 자금을 때려붓다가, 선거철이 지나 메스를 댄다 해도 이미 늦었다는 것이다.

정부가 구조조정 ‘컨트롤 타워’로 삼고 있는 범정부 ‘산업경쟁력 강화 및 구조조정 협의체’ 역시 지난해 11월 이후 총선이 끝날 때까지 5개월간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였다. 총선이 끝난 지난달 26일에서야 3차 회의가 열렸다.

국책은행 수장에 정부와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정권의 낙하산 인사가 줄줄이 내려온 점도 구조조정의 장애물로 꼽힌다. 전문성이 없는 낙하산 수장들이 임기 내 법정관리로 인한 부담을 떠안지 않기 위해 ‘폭탄 돌리기’ 하다 구조조정 때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산은의 경우 1954년 설립 이후 내부 출신 은행장이 임명된 것은 단 세 차례 뿐인 것으로 알려졌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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