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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토)

<김종현의 풍진세상> 구조조정의 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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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김종현 논설위원 = 정부가 부실기업 구조조정을 선언했다. 20년 전 환란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는 나라 경제가 통째로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언론은 온통 퇴출되는 기업이나 금융기관의 부음으로 도배됐다. 실업자가 양산되면서 거리로 나앉은 가장의 자살이 속출했다. 차가 줄어든 거리는 황량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식민지가 된 1997년 겨울과 이듬해 봄의 풍경이었다.

IMF 구제금융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금융과 기업 부실을 청소하는데 무려 170조 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그런데 또 좀비들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정부는 그동안 구조조정은 빚을 준 채권단 중심의 시장 자율로 해야 한다고 발을 빼고 있었지만 상황이 다급해지자 직접 나섰다. 더이상 폭탄 돌리기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대기업 구조조정에서 시장 자율이 작동한 적은 별로 없었다. 빚의 규모가 큰 대마(大馬)는 은행이 함부로 다룰 수 없다. 재벌공화국에서 대기업의 부실은 국가의 위기다. 과거 한보와 기아차그룹의 부실은 환란의 도화선이 됐다. 1999년 말 인류 역사상 최대 파산이라는 대우그룹의 해체 때는 나라가 흔들렸다. 약 30조 원의 공적자금을 쏟아부어야 했다.

환란 이후 구조조정을 게을리한 핑계는 수십 가지라도 댈 수 있다. 기업 오너들이 경영권을 박탈당할 수 있는 구조조정을 왜 하려 들겠는가. 은행이 대출 부실화 때문에 부도를 낼 수 없었던 것도 당연했다. 역대 정부가 실업 등의 사회경제적 파장을 우려해 은근히 부실기업의 연명을 도운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각각의 입장에서는 모두 그럴듯한 그 부조리한 '당연들'이 쌓여 해운업과 조선업의 부실이라는 폭탄이 됐다. 구조조정의 타이밍을 놓치고, 환부가 곪아 터졌다. 수술은 버틸 여력이 있을 때 해야 치유가 빠르고 돈도 적게 든다. 망해가는 기업의 구조조정은 그만큼 정상화가 어렵고 밑 빠진 독이 되기 쉽다. 기업과 은행, 정부의 도덕적 해이가 공적자금 투입만 늘리는 격이다.

더 문제가 되는 건 현대상선과 한진해운, 대우조선해양, STX조선 등 구조조정 대상 대기업들이 죄다 국책은행에 빨대를 꼽고 있다는 것이다. 물색 모르는 낙하산 CEO가 이끄는 국책은행들은 기업을 감시하거나 개혁할 능력이 안 된다. 적당히 정부 눈치나 보면서 귀찮은 일을 회피하고, 부실이 발생하면 정부에 앓는 소리를 해 혈세로 때운다. 기업에 이런 봉이 어디 있나. 이렇게 해서 산업은행의 해운사와 조선사 여신은 8조4천억 원, 수출입은행은 12조8천억 원으로 불어났다. 어마어마한 돈을 대주고도 관리는 엉망이었다. 산업은행은 대우조선해양이 대규모 적자를 내고 분식회계로 장부를 조작했는데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정부가 구조조정의 칼을 빼 들었지만 제대로 할지는 지켜봐야 한다. 분위기가 좋지 않다. 환란 당시의 구조조정은 나라가 거덜 난 상황이어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다. IMF와 미국이 국가부도를 내겠다고 협박하는데 개혁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김대중 정권 초기여서 돌파력이 있었고 헌신적인 관료들이 몸을 던졌다.

지금은 대통령의 임기가 후반으로 넘어간다. 다수당이 된 야당과 정부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 벌써 구조조정을 위한 재원 문제를 놓고 갈등이 불거졌다. 내년은 대통령선거가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없다. 대기업 구조조정을 강하게 밀어붙일 힘이 있는지 의문이다. 구조조정을 독하게 하려면 관료들이 목을 걸어야 한다.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에서 이뤄진 구조조정에 참여했던 관료들은 청문회에 불려 나가거나 수사ㆍ감사를 받는 것이 관행이 됐다. 토사구팽, 속죄양은 예나 지금이나 민심 수습엔 그만이다. 때문에 공무원이든 은행 직원이든 구조조정이라는 폭탄을 만지거나, 기업 매각에 관여하려 하지 않는다. 정부가 일찌감치 대우조선해양을 팔아 주인을 찾아줬다면 이처럼 부실 덩어리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우그룹이 수술대에 올랐을 때 총부채는 약 89조 원이었다. 현재 해운과 조선업에 대한 은행권의 총여신은 약 88조 원이다. 결코 만만한 덩치가 아니다. 물론 지금은 환란 때와는 여건이 다르다. 당시는 보유 외환이 거의 고갈돼 IMF와 미국에 달러를 구걸했지만, 지금 한국은행의 외환보유액은 3천700억 달러에 육박한다. 재정여건도 탄탄하다. 금융기관의 건전성도 양호하다. 저금리 시대다. 그래도 제대로 구조조정을 한다면 그 충격은 엄청날 것이다.

구조조정은 썩은 곳을 도려내는 것이다. 살이 찢어지고 피가 튀기에 고통스럽다. 그렇다고 대충 봉합하면 나중에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나 금융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기업 구조조정 방안을 보면 절박함이 없다. 부실ㆍ중복 산업의 경쟁력을 어떻게 확보하겠다는 것인지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합병, 빅딜, 사업부문 통폐합 등은 구조조정의 유효한 수단이다. 그런데 이걸 꺼려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 때 5대 그룹 빅딜 실패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모르지만, 당시는 개개의 기업 현실에 대한 고려 없이 정치적 업적에 급급했기에 좌초했다. 채권단이 관련 산업에 대한 충분한 분석과 정보를 토대로 전면에 나서고 정부가 지원책으로 뒷받침함으로써 기업들이 움직이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런 노력 없이 부실기업에 돈만 쏟아붓는 것은 연명만 시키겠다는 발상이다.

환란 당시 은행ㆍ기업 퇴출로 '저승사자'라는 별명이 붙은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은 "개혁을 하면 사방이 적이다. 죽을 각오로 해야 한다"고 직원들을 다그쳤다. "일이 많은 때 한가한 시절의 수단을 쓰는 건 지혜로운 사람의 준비가 아니다"는 한비자의 말도 자주 인용했다. 오늘 구조조정을 맡은 공무원들에게 이런 절실함과 각오가 있는가.

kimj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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