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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 (수)

정부·채권단 ‘감놔라 배놔라’…한국식 구조조정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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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기업 구조조정을 구조조정 하자



한겨레

전 세계 선박 발주량이 줄어들면서 수주량이 크게 감소해 지난해부터 대규모 인력감축 등 고강도 구조조정에 돌입한 조선업계에 위기의 그림자가 가시지 않고 있다. 사진은 상공에서 본 stx조선해양 본사 진해조선소 모습. 창원/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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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현지시각)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1면에는 미국 최대 석탄회사인 ‘피바디에너지’가 미주리주 동부 파산법원에 파산보호신청을 냈다는 소식이 실렸다. 기사에는 이 회사의 재무 상황과 업황 해설이 담겼다. 그러나 어디에도 돈을 빌려준 은행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거나 기업 회생을 위해 정부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최근 구조조정 드라이브는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입에서 시작됐다.

한국에선 ‘정부·채권단 주도’

채권단 구성 복잡 ‘신속결정’ 안돼
워크아웃·자율협약 등 작동 어려워
경영관리단 인물들 ‘전문성’ 떨어져

미국에선 철저한 ‘시장 주도’

정부는커녕 은행조차 등장 안해
부실자산 매각은 사모펀드와 거래
자구 한계땐 법원에 파산·회생 신청


유 부총리는 14일 워싱턴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구조조정을 직접 챙기겠다. 속도를 내겠다”고 말했다. 그 뒤 구조조정 소식을 전하는 국내 언론엔 채권단(주로 산업은행)이나 정부 고위 관리, 심지어는 야당 대표 등 정치권 인사까지 빠짐없이 등장했다.

이런 차이는 구조조정 방식이 서로 다른 데서 비롯된다. 미국의 구조조정은 철저한 ‘시장 주도’다. 정부는 물론 은행도 잘 끼지 않는다. 부실기업이 자산을 팔 때는 으레 사모펀드가 거래 상대방으로 등장한다. 자구 노력이 한계에 부딪히면 법원에 파산이나 회생 신청을 한다.

한국에선 구조조정이 채권단 중심으로 진행된다. 은행들이 빌려준 채권 규모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하는 ‘채권단 회의’가 사령탑 구실을 맡는다. 신규 자금 지원부터 매각 대상 자산 결정, 경영진 선임, 대주주 문책에 이르기까지 세부사항은 여기서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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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대규모 구조조정의 큰 밑그림은 실질적으로 정부가 그린다. 이번 해운·조선 등 구조조정의 밑그림 역시 기재부·금융위·해수부·고용부 장관 등이 참석한 ‘청와대 서별관 회의’에서 그렸다.

채권단(또는 정부) 주도 구조조정은 논란이 되는 사례들이 있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큰 무리 없이 작동했다. 문제는 이런 방식이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현재와 같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이나 자율협약(채권단 공동관리) 제도가 점점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워졌다고 입을 모은다. 이번 5대 취약업종에 대한 구조조정이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가 될 것이라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무엇보다 채권단 구성이 복잡해졌다. 현대상선의 경우 은행이 들고 있는 채권은 절반이 채 되지 않고 나머지는 개인투자자, 외국인투자자를 포함한 비은행 채권자다. 은행 몇 곳만 의기투합해 속도감 있게 구조조정을 할 여건이 아닌 것이다.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에 참여했던 한 금융계 인사는 “대우그룹 구조조정 당시 회사채 규모는 전체 채권 중 5%밖에 되지 않았다. 은행들이 이 5%를 대신 갚아주고 구조조정 계획을 쉽게 짤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주요 부실기업들의 채권 중 회사채 비중이 절반을 넘어서고 있다”고 말했다. 구조조정은 채권자들의 손실 분담과 신규 자금 지급 규모에 대한 합의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런 합의 자체가 매우 어려운 구조인 셈이다. 채권자가 늘면, 채권단 회의는 지지부진해지기 마련이다.

이처럼 채권단 주도 구조조정의 장점은 빛이 바래는 대신 단점은 부각되고 있다. 먼저 보신주의다. 국책은행은 물론 시중은행들도 내부에 ‘기업구조개선단’이란 이름의 대규모 부서를 운영하고 있다. 한 시중은행에서 부행장을 지낸 인사는 “부실 채권을 팔아서 장부를 깨끗이 하기보다는 들고 있는 게 상책이라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고 짚었다. 부실 채권은 애초 가격보다 크게 할인된 가격으로 팔 수밖에 없는 터라 부실채권 매각에 따른 가격 적정성 시비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이런 시비가 부담스러운 해당 업무 실무자나 부서장은 매각보다는 보유를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산업 구조가 한층 복잡해지는 흐름도 한계로 작용한다. 채권단은 대상 기업에 경영관리단을 파견해 사실상 경영에 직접 참여한다. 대우조선해양의 경우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에서 파견한 인물(김갑중 전 산은 부행장)이다. 문제는 대형 조선소를 경영할 정도의 전문성을 채권단이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돈이 되는 사업부와 그렇지 않는 사업부를 현명하게 구분할 능력이 없으니 구조조정에 속도가 붙기 어렵다. 한 국책연구소의 연구위원은 “대상 기업에 해당 업종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경영인이 배치돼야 하는데 현재는 정부나 국책은행 낙하산이 구조조정 대상 기업의 경영을 맡고 있다”고 꼬집었다. 기재부 고위 당국자는 “앞으로 구조조정은 법원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밝혔다. 전 시중은행 부행장은 “은행들이 부실 채권을 쉽게 정리할 수 있도록 기업부실채권 시장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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