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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광화문에서/박현진]이헌재로 푸는 구조조정 퍼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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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동아일보

박현진 산업부장


여름 소나기가 퍼붓던 2000년 8월 7일. 당시 이헌재 재정경제부 장관은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의 이임식이 열리기로 한 날이었다. 1997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으로 시작된 외환위기와 이후 2년여에 걸친 구조조정을 지휘한 후유증이었을까. 결국 병상에서 이임사를 작성해 배포해야 했다.

그는 이임사에서 ‘구조조정은 연습이 용납되지 않는 냉엄한 진검승부’라고 했다. 실제 그는 대우그룹 해체와 대기업 계열사를 업종별로 맞교환한 이른바 ‘빅딜’, 대형은행 통폐합 등에 칼을 썼다. 그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지만 그때 메스를 대지 않았다면 한국 경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을지 아무도 장담하긴 어렵다.

‘구조조정의 계절’이 다시 찾아왔다. 우리는 약 10년 주기로 터진 위기와 이어지는 구조조정의 악순환을 예외 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이번 위기의 직격탄은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조선 해운 철강 업종으로 향하고 있다. 해외시장 침체와 공급과잉으로 어려움을 맞고 있는 이 업종들을 현 상태로 끌고 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총선 직후 본보가 연재한 ‘이제는 경제다. 산업 대개조 골든타임 8개월’에 야권이 먼저 응답했고 진행 속도가 빠르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20일 ‘더 적극적 구조조정’으로 물꼬를 트자 새누리당은 여야정 협의체 구성을 추진하겠다고 화답했다. 정부도 구조조정 구상을 밝혔기 때문에 협의체 구성까지는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문제는 그 이후다. 총론에는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이제 각론에 들어가서는 백가쟁명(百家爭鳴)식의 대책이 쏟아질 것이다.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금융위원회 등 정부 내 물밑 주도권 싸움은 물론 같은 당내에서도 다른 목소리가 나올지 모른다. 정치권에서 구조조정 이슈를 빌미로 선명성 경쟁을 벌이다 자칫 배가 산으로 갈 수 있음도 경계해야 한다.

이헌재 전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의 별명은 ‘(부실)기업의 저승사자’였다. 환부를 잘못 도려낼 두려움에 수술을 주저하거나 주변에 둘러선 다른 의료진의 간섭에 개의치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확실하게 ‘집도의’의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동안 경제 활성화법을 통과시켜 주지 않는다고 국회 탓을 많이 했다. 이것이 민심을 움직이지 못했음은 이번 총선에서 입증되었다. 그 사이 구조조정의 주도권은 야권이 거머쥐었다. 박 대통령도 한국 산업의 구조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계속 냈지만 울림은 크지 않았다. 정치권이 화답한 구조개혁을 이끌 정부 내 컨트롤타워를 분명히 하고 힘을 실어줌으로써 그 의지가 립서비스가 아님을 입증해야 할 때다.

IMF 구제금융 이후 2년여 동안 이어진 구조조정 현장을 취재하면서 눈물겨운 사연들을 많이 접했다. 벌써 조선업종에서는 6000여 명이 해고될 것으로 보인다. IMF 때는 환부를 도려내기 급급해 아픔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경제의 기초체력이 허약해진 상황에서 고통과 부작용을 도외시한 채 수술에 들어간다면 자칫 환자가 숨질 수도 있다. 중국 정부가 철강산업 등의 구조조정에서 쏟아질 180만여 명의 실직자를 위해 내놓은 대책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또 이번에는 환부에 새살이 돋을 수 있도록 신성장동력까지 고민해야 한다. IMF 때보다 어찌 보면 훨씬 더 어려운 수술대 앞에 서 있는 셈이다.

이 전 부총리의 이임사 마지막 문장이 힘이 될지 모르겠다. ‘평탄해 보이는 길에 유혹받지 말고 빛 안 나고 인기 없는 일에 전념해 달라. 외로운 마음이나 서운한 심정이 없을 수 없겠지만….’

박현진 산업부장 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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