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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 (금)

김일성, 중국공산당 '재만 광복회'를 자신의 '조국광복회'로 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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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만수대 언덕의 김일성 김정일 동상을 인민군장병들과 각계층 근로자들, 청소년학생들이 찾고 있다/출처=노동신문)




아시아투데이 최영재 기자 =

광복 70년, 창간 10주년 특별기획
종북의 뿌리 ‘김일성 바로 알기’ 13편

김일성이 자신의 항일투쟁사를 위조하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만들어내고는 반복적으로 이를 선전하는 방식이다. 거짓말도 반복적으로 듣다보면 진짜처럼 여기게 된다.

둘째는 자신이 직접 한 일을 ‘확대 과장’하는 것이다. 자신의 공적이 1이라면 이를 10배, 100배로 부풀리는 것이다.

셋째는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위조하는 것이다. 이 때 김일성이 주로 쓰는 수법이 있다. 자신이 참여했던 주요 사건에 등장하는 자신의 상관이나 주변인물 업적을 자신의 공적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사에서 가장 큰 업적으로 선전되는 ‘보천보 전투’가 바로 상관의 공적을 자신의 공적으로 둔갑시키는 예다.(본 시리즈 1편 ‘조직된 신화 보천보 전투’, 3편 ‘북한 김일성 주석 이전에 존재했던 4명의 김일성’ 참조)

보천보 전투 이외에 김일성 항일투쟁사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선전되는 것이 김일성이 1930년대 중반에 창립해서 영도했다는 ‘조국광복회’다. 조국광복회는 ‘보천보 전투’와 쌍벽을 이루어 김일성을 위대한 항일혁명지도자로 우상화하는데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또 날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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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 전투를 보도한 동아일보 1937년 6월 5일자 호외. 이 전투 주역은 동북항일연군 제6사장 김일성(북한의 김일성과는 동명이인으로 1937년 11월 13일 사살됨). 이 보천보 전투의 국내 내응 조직이 ‘조국광복회’다.




북한이 역사를 위조할 때 중요한 줄거리라든가 중요한 사건 같은 것은 반드시 있었던 사실을 도용하거나 위조한다. 이렇게 위조한 역사를 김일성의 경력에 갖다 붙인다. 조국광복회가 대표적 예다.

북한 사회과학출판사에서 1973년 펴낸 ‘정치사전’에서는 조국광복회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항일무장투쟁 시기 위대한 주체사상을 구현하시여 창건하시고 령도하신 우리 나라에서의 첫 반일민족통일전선조직, 1936년 5월 5일에 창건되었다’

또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서인 ‘조선전사’와 ‘력사사전’은 이렇게 쓰고 있다.
‘1936년 2월에서 5월에 이르는 기간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남호두에서 동강에 이르는 기나긴 고난의 행군 도정인 험준한 산과 높은 고개를 넘어 천리의 눈벌판을 헤쳐 나가면서 ‘조국광복회’의 위대한 구상을 쉬지 않고 연구 진행하시였다. …(중략) … 같은 해 5월 력사적인 동강회의에서 상설적인 반일 민족통일전선 조직을 완성할 것과 그 조직의 명칭을 ‘조국광복회’로 할 것을 제의하시였다.

북한은 이 동강회의 참석자들이 김일성이 친히 작성 발표한 ‘조국광복 10대 강령’과 그 ‘창립선언’을 열광적으로 환영 지지했고 조선인민 전체의 변함없는 의지와 염원을 담아 김일성을 ‘조국광복회’ 회장으로 추대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이에 김일성은 1936년 5월 5일 ‘조국광복회’ 창건을 온 세상에 선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국광복회’는 실제로 해당 시기 만주에 존재한 조직이었다. 그러나 그 명칭이 그냥 ‘조국광복회’가 아니라 정식으로는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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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항일무장투쟁사의 양대 줄기는 보천보 전투와 조국광복회다. 그러나 이 양대 줄기가 모두 날조의 역사다




◇조국광복회, 김일성 아닌 중국인 웨이청민(魏極民) 창설 주도

실제로 이 조직은 김일성이 아니라 1935년 7월 25일부터 8월 1일에 모스크바에서 소집된 ‘코민테른 7차대회’에 참석하고 복귀한 중국 공산당 동만특위(東滿特委) 책임비서 겸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정치위원 웨이청민(魏極民)이 국제 공산당 7차 대회에서 채택 결의한 중국 내 제민족 반일통일전선체 구성에 관한 테제에 근거해 창설을 주도했다.

웨이청민 정치위원은 1936년 5월 제1로군 군?정 간부회의를 소집해 한인들의 반일통일전선체를 조직하도록 지시했다. 이 지시를 받고 실행한 한인이 동만특위 위원 겸 제1로군 당위원회 성지주임 전광(全光, 본명 오성륜吳成崙)이었다.

전광은 다른 조선족 간부들과 협의하여 ‘재만한인광복회’라는 이름의 반일 통일전선체를 발족시키기로 하고 그 선언문과 10대 강령을 작성했다. 이어 상부인 중국공산당 동만특위의 결재를 얻어 이를 1936년 6월 10일자로 발표했다.

그 선언문과 10대 강령은 재만한인 조국광복회 발기위원 전광, 장익수(張翼洙), 이상준(李相俊, 일명 이동광) 등 3사람 명의로 발표되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북한의 김일성은 조국광복회를 국제공산당 7차 대회 결정에 따라 자신이 조직했다고 선전하고 있지만 그는 당시 그러한 것을 조직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재만한인광복회를 조직한 전광은 동만주에서 중국공산당 조직 속에서는 한인으로는 제일 높은 자리에 있었다. 보천보 전투를 이끈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6사장 김일성(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아닌 3번째 김일성, 1937년 11월 13일 사살됨, 북한 김일성은 이 3번째 김일성의 전투를 자신의 업적으로 날조하고 있음)도 전광의 하급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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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족 전사들




◇조국광복회 창립선언문, 10대 강령 조광(오성륜)이 작성

이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도 북한에서는 ‘남호두 동강회의’를 김일성이 소집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 간부회의라고 날조하고 있다. 또 북한은 김일성이 중국공산당과는 아무런 관계 없이 독자적으로 ‘조국광복회’를 창건했으며 그것은 당시 국내외의 광범위한 반일민족통일전선체였다고 선전하고 있다. 또 원래의 조직 명칭 중에서 ‘재만한인’ 네글자를 빼버리고 그냥 ‘조국광복회’라고 부르고 있다.

김일성은 원래의 ‘10대 강령’ 선언일인 6월 10일도 5월 5일로 변조했다. 이어 당시 조국광복회는 만주대륙은 물론 한국의 청진, 원산, 서울, 대구, 부산, 광주, 전주, 군산 등 주요 도시를 비롯 전국 방방곡곡에 그 조직이 결성되었고, 김일성의 영도를 높이 받든 그 회원 수는 수십만에 이르렀다고 날조하고 있다. 또 김일성은 이것을 기반으로 ‘조선 공산당’ 창건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며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쓰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재만한인조국광복회는 지방조직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지방조직이 만들어지면 다시 창립총회를 열어 회장 등 간부진을 구성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지방조직이 진척되지 않아 창립총회를 정식으로 열지 못했다. 때문에 회장 등 간부를 선출하지 못했다. 그래서 임시대표를 이동광(李東光) 이란 사람이 맡았다. 김일성이 회장으로 추대되었다는 북한의 선전은 이중 삼중의 거짓말이다.

재만한인조국광복회의 지방조직이 진행된 유일한 곳은 전국 방방곡곡이 아니라 동북항일연군 제 6사장 김일성(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아님)의 유격구인 장백현과 그 이웃인 국내의 갑산군 일대 등 단 2곳이었다.

장백현과 갑산군 일대에서 지방 조직 사업을 이끈 이는 동북항일연군 제 6사장 김일성(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아님)이었다. 보천보전투의 주역인 이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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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김일성이 백두산 밀림에서 바위덩어리를 책상과 의자 삼아 조국광복회 창립선언문과 10대강령을 작성했다고 왜곡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작성자는 중국 공산당 동만특위의 한인 전광 위원이었다




◇김일성 조국광복회 지도이념까지 날조

더 어처구니 없는 일은 김일성은 이렇게 변조한 ‘조국광복회’의 지도이념까지 그동안 여러 차례 개조했다는 사실이다. 초기(1960년대)에는 ‘10대 강령’을 두고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 경 제적 상황과 계급 호상관계를 맑스?레닌주의적으로 분석하여 조선혁명의 성격과 임무, 혁명의 동맹자와 투쟁대상, 전략전술상의 제 원칙 등을 명확히 규정한 력사적 문헌이다.… (중략) … 그것은 조선인민의 역사상 처음 가진 맑스?레닌주의적 혁명 강령이었다’라고 정의하고 있다.(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편 「조선근대혁명운동사」 1961년 4월, 백봉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 평양 68년 4월)

그러나 1970년대를 거쳐 80년대에 이르러서 ‘맑스-레닌주의’는 자취를 감추고 대신 김일성 ‘주체사상’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다. 다음은 그 예다.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은 주체사상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관통되어 있는 주체의 혁명적 대강령이다. … (조선로동당 중앙위 당력사연구소편 「조국광복운동사」86년 5월, 「조선전사」제 19권 ’‘항일무장투쟁사’<4>).

또 북한은 ‘조국광복회’ 창립 선언문과 ‘10대 강령’은 김일성이 직접 창안, 집필하고 ‘김동명’이란 가명으로 발표했다고 주장하면서 조작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창립선언문과 10대강령은 앞서 언급한 전광(오성륜)이 작성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민족주의적으로 호소한 문장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반일운동에 관계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작성할 수 있는 정도의 문장이었지 유달리 독특한 내용이 아니었다.

그런데 북한은 이 전광의 선언문과 10대 강령을 해방 후 시점의 정세에서 변조해 놓고 이를 김일성의 위대한 이론적 업적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여기서 변조의 기준이 된 것이 1946년 3월 23일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의 이름으로 발표된 ‘조선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20개정강’이다. 이 20개 정강도 실은 소련군이 작성하고 김일성의 이름으로 발표된 것이다. 내용은 민주주의적 껍데기 속에 공산당 독재의 길을 교묘히 감추어 놓은 정강이다. 이 정강의 전술적 원칙을 전광이 작성한 10대 강령에 옮겨 놓은 것이 변조된 조국광복회의 10대 강령이다.

이를 북한은 ‘조선 인민이 역사상 처음으로 가진 마르크스?레닌주의적 혁명강령’ 또는 ‘해방 후 우리나라에 세워질 정권을 미리 내다보고 작성한 인민정부 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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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김일성이 ‘조국광복회’를 창설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김일성은 그럴만한 지위에 있지 않았다.


의 강령’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김일성의 조국광복회 관련 4가지 날조

이처럼 김일성은 조국광복회와 관련해 크게 4가지 사안을 날조했다. △첫째, 재만한인조국광복회라는 명칭을 ‘조국광복회’로 변조하고 △둘째, 국제공산당의 통일전선전술에 따라 중국공산당 동만주특위에 의해 조직된 것을 자신의 통일전선 사상에 따라 조직한 것이라고 날조하고 △셋째, 조광(오성륜)이 작성한 창립선언과 10대 강령을 자신이 작성했다고 도용하고 △넷째, 동북항일연군 제 6사장 김일성(37년 11월 13일 사살된 3번째 김일성, 북한 김일성과는 동명이인)이 중국 장백현과 국내 갑산 일대에서 진행한 지방 조직사업을 자신이 했다고 조작했다.

설사 이런 4가지 사안들에서 북한의 김일성이 일부 관여했다고 해도 그것이 북한에서처럼 ‘항일운동사 유일 최고의 정치 경력’이라고 떠들 일은 아니다. 그보다 몇 백배나 더한 역사적 사실들과 인물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북한 내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도 이런 거짓 ‘김일성 항일투쟁사’가 사실로 대접받고 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바로잡는 것이 본지가 ‘김일성 바로 알기’시리즈를 계속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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