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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재판장 “선거개입은 최고 주권자 국민위에 군림하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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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판결문 통한 준엄한 질타

“자유민주주의 지키려 했다지만 정작 그 핵심가치 훼손”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 안돼”

“불법적 활동 엄정히 단죄, 자기점검·통제 계기로 삼아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을 법정구속한 김상환 서울고법 형사6부 재판장은 ‘양형 이유’를 설명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 했다지만, 정작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를 훼손한 것이 명백하다”고 준열하게 꾸짖었다. “(대선개입을 통해) 국민의 정치적 의사 형성을 왜곡하고,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부여한 평등한 자유경쟁의 기회를 침해한 것이다. 이로써 대의민주주의의 정신을 훼손하였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국정원의 권력 남용과 이를 사법적으로 통제해온 역사를 6쪽에 걸쳐 언급했다. 국정원은 이번 사건에서 문제가 된 2012년뿐 아니라 국가안전기획부 시절인 1992년에도 ‘부산 초원복집 사건’ 등을 통해 선거개입 사건에 여러 차례 연루됐다. 그 뒤 안기부 정보활동 범위를 국외정보 및 국내보안정보로 제한하고 전체 직원들에게 정치관여를 금지하는 내용으로 안기부법이 개정됐다.

특히 재판부는 국정원이 2007년 권력을 남용해온 ‘암흑의 역사’를 반성하는 의미로 작성한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직접 인용해 깊은 반성과 성찰을 요구했다. 재판부는 국정원이 과연 잘못된 과거를 진지하게 반성했는지를 물었다. 재판부는 이 보고서에 나오는 “선거에서 중립을 지켜야 할 정보기관의 불법적인 선거개입은 정치적 독립성을 지켜야 할 정보기관이 존립 근거를 스스로 훼손하고 최고 주권자인 국민 위에 군림하는 행위이다”, “정보기관의 정치개입 중에서도 선거개입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되거나 합리화될 수는 없는 문제다”라고 쓰여 있는 대목을 적시한 뒤 “국정원이 이러한 거울(보고서) 앞에 서서 과연 자신들 활동의 적법성과 합리적인 우리 국민들에게 어떻게 이해될 것인지를 진지하게 따져 보았는지 극히 의문이다”라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국정원의 인터넷 여론조작이 정치를 왜곡하는 폐해를 낳았다는 점도 짚었다. “국정원의 소중한 기능 및 조직 중 일부를 사실상 특정 정당이나 정치적 입장에 대한 반대 등의 활동에 활용함으로써, 선거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마련된 선거운동의 주체, 시기, 선거운동원의 제한, 비용의 규제 등에 관한 다양한 제한 규정을 사실상 모두 어긴 것과도 다름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또 “안기부가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꾼 1999년 이후 국가정보기관의 선거개입 의혹이 큰 논란이 된 경우가 거의 없어 국정원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축적되어 가던 시점”에 이번 사건이 벌어졌다며 엄벌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국정원 활동의 밀행성, 보안성이라는 보호막 뒤에 숨어 유사한 활동이 계속될 위험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판결문 말미에 <논어> ‘위정’ 편에 나오는 “나와 다른 생각을 공격하면 (자신에게) 손해가 될 뿐”이라는 뜻의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를 인용하면서 “국정원은 누구보다 이를 지켜야 할 국가기관인데도 헌법상 정치적 기본권인 국민의 생각과 의견을 심리전의 대상으로 삼아 이를 강행했다”고 했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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