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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문창극 칼럼 도대체 내용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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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새 국무총리 후보로 문창극 전 중앙일보 대기자가 지명된 가운데, 그가 과거에 썼던 칼럼이 논란이 되고 있다. 주로 ‘극보수’의 관점에서 인물과 사회를 바라보거나 정책을 평가한 글들이다. 그가 쓴 칼럼 몇 편을 소개한다.

내세웠던 정책을 비판하는 칼럼들이다.

▶공짜 점심은 싫다(2010년 3월15일 등록)

공짜 점심이 지방선거의 주요 쟁점이 될 것 같다. 한쪽은 모든 아이들에게 무료로 점심을 주자는 것이고, 다른 쪽은 왜 점심 값을 낼 수 있는 집 아이들에게도 무료로 점심을 주느냐는 것이다.(중략…) 무료 급식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싶다.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개인이 해야 할 일과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구별되어 있다. 치안과 국방을 맡고, 다리와 댐을 만들고, 학교를 세우는 일 등 개인으로서 할 수 없는 일들은 국가가 세금을 거두어 대신 해 준다. 그러나 국가가 그 한계를 넘어 개인의 생활까지도 책임지겠다고 나온다면 그 부담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말이 좋아 포괄적 복지이지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다른 한편 무료 급식은 배급 장면을 연상케 한다. 좀 심하게 비유하자면 우리 아이들이 공짜 점심을 먹기 위해 식판을 들고 줄을 서 있는 것과, 식량 배급을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북한 주민이 그 내용 면에서는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내 아이의 점심을 내가 책임지는 것은 거창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바로 개인의 독립이며 자존이기 때문이다. 내가 할 일은 내가 하는 것이지 국가가 대신 해 주는 것이 아니다.(중략…) 공짜 점심은 국민 의식의 수준에서 단순하게 점심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의식주를 포함해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때 독립적인 개인은 사라지고 의타적인 인간만이 넘치게 된다. 이에 비례해 국가의 간섭은 심해진다. 개인의 자유와 존엄은 시혜를 베푸는 국가에 반납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북한처럼 나라에서 먹여주고 입혀 주는 대로 살 것인가? (중략…)자녀 양육 문제에서 가정의 책임이 무너진다면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인가? 국가나 권력이 나설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국가 의존형 인간들이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지켜 낼 수 있을까? 그런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가능할까? 결국 전체주의, 공산주의형 인간을 만들어 내지는 않을까? 개인이든 국가든 진정한 번영은 독립심에서 출발한다. 그런 점에서 무료 급식 문제는 단순하게 먹는 문제, 편리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이자 이념의 문제다. 공짜 점심 한 끼로 우리의 자유와 존엄을 팔 수 없다. 공짜 점심이 혹시 실현된다면 ‘내 아이는 내가 먹이겠다’는 도시락 싸가기 운동이라도 벌여야 한다. 그것이 가정의 가치를 바로 세우는 것이며, 자유와 민주주의의 기초를 지키는 일이다.



▶공인의 죽음(2009년 5월26일 등록)

그가 떠난 날 토요일 오후 서울시청 앞에선 분향소를 차리려는 측과 경찰이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흰 국화 꽃을 들고 찾아온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경찰이 어느덧 포위했다. 분향소를 차리려는 측의 한 사람이 ‘근조’라는 검은 리본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다가와 리본을 내밀었다. 나의 머릿속은 갑자기 복잡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근조라는 리본을 나도 달아야 할까? 그의 죽음이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그가 겪은 고통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그의 선택이 옳았을까? 백번 양보해 자연인으로서의 그의 선택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국가의 지도자였던 그가 택한 길로는 잘못된 것이 아닐까. 나는 리본을 거절했다. 그는 나를 힐난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뉴라이트에서 나왔어요?” 그의 죽음은 분열과 갈등을 다시 만들고 있었다.(중략…) 대통령을 지냈다는 대표성과 엄중함에 왜 의식이 미치지 못했을까. 그가 유언에서 ‘나는 대통령으로서 명예를 지키지 못해 이렇게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나의 죽음으로 나라가 분열을 넘어 새 길을 가기 바란다’고 했다면 어땠을까. 그렇지 않아도 세계 최대의 자살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이 나라에서 대통령을 지낸 사람까지 이런 식으로 생을 마감한다면 그 영향이 어떻겠는가. 죽음이 모든 것을 덮는다고 하지만 그의 죽음은 자연인과 공인의 성격으로 나누어 판단해야 한다. 자연인으로서 가슴 아프고 안타깝지만 공인으로서 그의 행동은 적절치 못했다. 그 점이 그의 장례절차나 사후 문제에도 반영되어야 했다. (중략…) 우리는 퇴임 대통령 하나를 보호하지 못하는 불명예스러운 나라가 되었다.



▶김석기를 살려야 한다(2009년 02월02일 등록)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한다. 김석기 경찰청장 후보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법을 집행하다 발생한 사고이기 때문에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주장이 있고, 인명의 피해가 있었으니 당연히 책임을 지워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한쪽은 법치를 말하고, 다른 쪽은 생존을 위한 저항권을 말한다. (중략…) 민주주의를 하자면 법치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법은 공정해야 한다. 법이 공정치 못하면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이 저항권이다. 야당이 국회에서 망치를 들고 폭력을 서슴지 않는 이유는 통과될 법들이 악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MB악법’ 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악법은 지키지 않아도 되고, 반대를 위해 폭력을 행사해도 무방하다는 논리다. 이번 사건도 개발이익은 땅주인과 건설업자가 다 차지하고 세입자들은 맨몸으로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으니 법이 공정치 못한 데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니 폭력으로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주장도 동정을 받을 만하다. 따라서 세입자의 권익도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을 이제부터 논의해야 한다. 그러나 현 법체제에서는 세입자의 권리가 그 정도뿐이니 안타깝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 법치라는 것은 계약의 준수이기 때문이다. (중략…) 이 사건을 놓고 사회는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아니 우리 사회는 이미 두 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한쪽은 지난번 쇠고기 촛불시위처럼 나라를 한 번 더 흔들려 벼르고 있고, 다른 쪽은 법치가 무너진다고 신문광고를 내고 있다. 이 나라에서는 무슨 이슈든 이처럼 편짜기로 갈라진다. 이러니 우리 사회에서 타협이란 단어가 통하지 않는다. 한쪽을 택하면 거센 저항을 각오해야 한다. 다가올 봄에 다시 촛불시위가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정권은 그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가장 손쉬운 선택은 ‘경찰청장의 책임을 물어 사퇴시키고 폭력 참가자도 엄벌한다’는 양비론적 해결이다. 이번 사건의 결말이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 이 나라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 하나의 분수령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법치와 저항권은 민주국가에서 둘 다 필요하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있다. 그 우선순위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독재의 시대라면 저항권이 우선될 수 있다. 그래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를 ‘독재 정권’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정부를 향해 들고 일어나라는 메시지다. 나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는 저항권이 아니라 법치라고 생각한다. 이 정부가 잘못한 일도 많았지만 외국에 나가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대한민국이 독재 정부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부족한 것은 저항 정신이 아니라 법치 문화다. 우리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에게 동정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과 법이 대립할 수는 없다. 경찰청장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두고두고 이 나라에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앞으로 경찰청장의 목은 데모대가 쥐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질서 유지를 맡길 것인가? 이번 사건은 여야가 타협할 사안이 아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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