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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레닌그라드에 왔던 핀란드 자본주의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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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한겨레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나는 어린 시절을 냉전 말기의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보냈다. 냉전인 만큼 자본주의 국가로 출국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다른 세계’로 가는 지난한 일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시내에 나가기만 하면 내 고향에서, 나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온 시민들을 언제나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이웃 나라 핀란드 사람들이었다. 중립국으로서 서방과도 소련과도 두루두루 물적·인적 교류를 할 수 있었던 핀란드에서는 레닌그라드 단기 투어가 생활의 일부였다. 관광만도 아니었다. 핀란드 건설사들이 현대식 빌딩들을 건설하는가 하면, 소련의 한국학 전문가들은 헬싱키대학이나 또 하나의 중립국인 스웨덴의 스톡홀름대학을 통해서 소련에서 접근이 불가능했던 남한의 연구 성과들을 간접적으로 입수할 수 있었다. 냉전의 엄혹함 속에서도 북유럽에서는 나름의 선린 관계가 오아시스처럼 꽃피었다.



물론 핀란드 사람들의 이러한 단기 투어가 전혀 문제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거운 주세 때문에 술값이 비싸고 공공장소에서 음주를 못 했던 핀란드 관광객들이 소련의 ‘값싼 보드카’를 폭음하며 종종 주정을 부리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약소국 핀란드의 내정에 대한 강대국 소련의 간섭 가능성이었다. 심지어 핀란드의 대중매체에서는 소련 지도부나 체제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을 삼가는 등 자기 검열을 해야 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핀란드에서 정치 망명을 시도하려던 소련 공민들은 곧바로 강제 송환의 대상이 되곤 했다. 한데 중립 노선에 의한 소련과의 우호관계는 핀란드에 지정학적 안정을 가져다주었고,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유리했다. 냉전이 치열했던 40년 전 핀란드의 수출에서 소련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4분의 1이나 되었다. 나중에 이동통신사로 유명해진 노키아라는 핀란드 굴지의 기업이 냉전 시절 소련에 최첨단 통신 설비를 제공하면서 점차 국제적인 대기업으로 성장한 것은, 중립에 서서 냉전의 전선을 초월했던 핀란드 외교의 이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40년 전의 냉전 세계와 닫힌 경계에 도전했던 당시 핀란드 중립 외교의 교훈을 왜 떠올리고 있는가? 오늘날 세계에서도 탈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지정학적 ‘지층’들 사이의 경계선들이 가면 갈수록 확연해지고 있다. 이 경계선들을 명확히 하는 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크게 기여했지만, 그 이전에 그리고 그 이상으로 첨단기술 분야에서 중국의 도전을 받는 미국이 주도하는 대중국 무역전쟁은 지정학적·지경학적 분절화를 초래하는 주범이었다. 미국 주도의 대중국 첨단 반도체 수출 봉쇄와 외국 투자에 대한 차단 압력 등의 결과로, 6년 전에 전세계 반도체 관련 투자의 48%를 유치했던 중국이 작년에는 1%밖에 유치하지 못했다. 중국에 대한 전체 외국 투자는 작년에 2021년에 비해 거의 11배나 줄어들었다. 이 와중에서 가면 갈수록 지정학적으로도 지경학적으로도 ‘중국 블록’과 ‘미국 블록’이 뚜렷해지고 그 사이의 관계들은 각종 제한, 통제를 받게 된다.



한데 세계 체제가 새로운 균열을 향해 변해가고 두 블록 사이의 괴리가 가면 갈수록 더 벌어지지만, 그 사이를 가로지르면서 ‘양쪽’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할 줄 아는 ‘새로운 핀란드’들은 곳곳에 있다. 우리들의 생존을 위해 그들의 경험을 적어도 참고는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런 나라 중의 하나가 바로 싱가포르다. 한국처럼 싱가포르 역시 반공 국가로서의 과거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에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중국에 대한 투자와 중국과의 무역 등은 싱가포르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된 것이다. 싱가포르의 대미 무역과 대중국 무역이 서로 거의 엇비슷하게 중요한 가운데, 싱가포르는 안보 정책 차원에서는 ‘등거리’를 고수하고 있다. 미 해군이 싱가포르의 군항 시설을 이용하는 한편, 2009년 이후부터 싱가포르군과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연합 훈련을 하는 등 안보 협력도 만만치 않다. 대미·대중국 군사 협력을 동시에 하는 싱가포르는, 2년 전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미국이 벌이는 전쟁에 연루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기도 했다. 이 선언은 싱가포르형 등거리 외교의 백미였다.



물론 각국의 상황이 다르고, 한국과 핀란드 내지 싱가포르의 상황도 여러모로 다르다. 한국이 과거의 핀란드와 같은 중립국도 아니며, 미국의 동맹국인 만큼 싱가포르처럼 완전한 등거리 외교를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 그렇지만 동맹국이라 해도 대북 관계를 포기하거나 한반도 이외의 지역에서 벌어지는 분쟁에 연루될 만큼 미국을 맹종할 필요는 없다. 작년 동아시아연구원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66.5%나 되는 응답자가 한-미 동맹 때문에 한국이 한반도와 무관한 국제 분쟁에 휩쓸릴 위험이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는데, 이는 결코 기우가 아니다. 중립 내지 등거리 외교는 못 하더라도 적어도 싱가포르 못지않게 한국의 성장에도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중국과의 경제적 분업 구조를 유지하고, ‘중국 블록’과의 관계 악화를 피할 정도의 ‘스마트 외교’를 할 줄은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한반도에서의 무력 충돌이나 한반도 바깥 무력 충돌에 한국이 연루될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면서 적어도 한국이 지금 누리고 있는 상대적인 번영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윤석열 정권의 ‘동맹’ 일변도 외교는, 이미 한국 주변의 안보, 경제 환경의 악화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미국에 대한 충성을 과시하려 했던 외교 정책의 결과로 남북 관계가 완전히 동결되고 한-러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어, 한반도에서의 안보 균형을 잠재적으로 위협하는 북-러 사이의 밀착도는 1980년대 초·중반 이상의 수준에 도달했다. 정권 주도의 중국과의 ‘탈동조화’ 속에서 작년 한국 자본의 중국 투자는 재작년에 비해 78%나 줄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구가 줄어들어 2030년대에 평균 성장률이 0.6%밖에 안 될 한국이 ‘미국 블록’ 안에만 갇히면 1990년대 이후의 일본에서 볼 수 있었던, 끝이 보이지 않는 침체를 면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특정 열강에 대한 종속에 따른 재앙을 피하고자 한다면, 평화·민생을 두루 고려하는 스마트 외교부터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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