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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세상읽기] 부자에게 세금을 / 이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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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강국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



자본주의의 한복판에서 ‘부자에게 세금을’이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상위 0.1% 거대 부자들의 자산이 전체 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70년대 약 7%에서 현재 약 20%까지 높아졌다. 이에 대해 민주당의 대선후보들이 놀랄 만한 공약을 제시하고 있다. 최근 민주당 경선에서 1위로 나선 워런은 5000만달러 이상의 자산에 대해 2%, 10억달러 이상에는 3%의 부유세를 매기자는 공약을 발표했다. 샌더스의 부유세는 3200만달러 이상 자산에 1%, 그리고 차차 높아져 100억달러 이상에는 8%다. 그는 상속세의 급격한 인상도 약속했다.

이러한 정책은 소득이 아니라 자산에 세금을 매기는 것인데,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이를 엄밀한 연구로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워런 후보의 경제정책 자문에 응하는 버클리대학의 사에즈 교수와 주크만 교수가 대표적이다. 과세자료를 이용하여 불평등을 추적해온 사에즈 교수는 이미 유명한 논문에서 최고소득계층의 세수를 극대화하는 최적소득세율이 약 70%라고 발표한 바 있다. 실제로 젊은 좌파인 오카시오코르테스 민주당 의원은 최근 최고소득세율을 70%로 인상하자고 주장하여 각광을 받았다.

과연 거대 부자들의 자산에 매기는 세금이 효과적일까. 이들은 누진적 자산세, 혹은 부유세가 평등과 효율을 모두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자본이득에 대한 세율이 낮아서 전체 가구가 내는 모든 세금의 실효세율 평균이 28%인데 엄청난 부를 지닌 400대 부자의 실효세율은 23%다. 이들의 연구는 워런의 부유세가 세금의 누진성을 크게 높이고 세수도 약 2000억달러나 올릴 수 있다고 보고한다. 특히 세금경쟁과 세금회피에 무력하여 성공적이지 못했던 유럽과 달리, 미국은 정보공유와 효과적인 과세집행으로 부유세가 효과적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다른 경제학 연구들도 자산에 대한 과세를 지지하고 있다.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오늘의 소득이 내일의 자산이고 자본은 성장의 투입요소이니 자산에 대한 세금을 반대한다. 그러나 미네소타대학의 구베넨 교수 등의 최근 연구는 투자가 이질적이며 수익률이 서로 다른 경우 자본소득 대신 자산에 과세하는 것이 효율적인 투자를 촉진하여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에즈 교수도 현실에서 상속, 수익률, 선호 등의 차이로 부의 차이가 있으면 자본에 대한 세금이 효율적일 수 있음을 보인다.

정치적 지형도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거대한 부가 정치권력의 집중으로 이어져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는 우려를 배경으로 60% 넘는 미국 시민이 워런의 부유세를 지지하고 있다. 피케티 교수도 최근 출판된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누진적 자산세와 상속세 인상에 기초하여 25살이 되는 모든 성인에게 약 12만유로의 기본자본을 제공하자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의 근본인 소유권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고 토지개혁과 같은 자산의 재분배를 영속적으로 실시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이 현실이 될 수 있을지는 결국 정치의 변화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제 좌파가 아닌 주류경제학의 연구나 국제기구도 번영을 위해 불평등을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정치판에서 약자들의 목소리는 듣기 어렵고 기득권의 성은 공고하며 불평등에 대한 불만은 우파 포퓰리즘의 득세로 이어졌다. 불평등과 싸우는 새로운 수단으로 자산에 대한 과세가 정치적으로 얼마나 힘을 얻을지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세습자본주의가 고착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큰 한국에서도 부동산을 포함한 모든 자산을 대상으로 한 부자 증세를 논의해야 할 때다. 물론 소득세 실효세율이 너무 낮은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상위 10~20% 중상위 소득층의 광범위한 소득세 증세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최상위 부자들의 자본소득 집중도가 높아지고 있다. 국세청에 따르면 2017년 상위 0.1%의 통합소득은 하위 27%의 통합소득과 같을 정도였다. 특히 이자, 배당, 부동산소득 등 종합소득의 상위 0.1% 집중도가 2013년 8.9%에서 2017년 9.7%로 높아졌고 통합소득의 집중도도 3.8%에서 4.3%로 높아졌다. 이는 우리도 부의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민주노동당이 ‘부자에게 세금을’이라고 외친 것이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지금이야말로 담대하게 불평등에 맞서 싸우는 정치인과 이들을 지지하는 경제학자들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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